<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영화는 예이츠의 <한 아일랜드 비행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다>라는 시구절의 낭독으로 시작한다. 노년의 그레이스(어네트 버닝)에게 한 방 펀치처럼 ‘훅’ 하고 들이닥친 이혼. 사랑의 파국도 죽음의 순간 돌아본 삶처럼 한낱 부질없는 것이니 힘들어도 삶을 이어가라며 영화는 남겨진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깍아지른 듯한 거대한 하얀 절벽과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바다가 만나는 영국 남부의 ‘호프 갭’(Hope Gap) 해변을 예이츠의 시를 읊조리며 홀로 산책하는 그레이스. 시선집을 만드는 그녀는 이름만큼 우아해 보이지만 그녀의 태도는 시종 일방적이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우아함은 집에 도착하자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의 등장으로 깨진다. 그레이스와는 반대로 내성적이고 감정의 표현을 아끼는 에드워드. 영화의 시작부터 서로 어긋나는 부부의 대화는 시종 살얼음판을 걷듯 불안하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돌아와 차를 끓이는 남편에게 왜 자기에게는 차를 마실 것이냐고 묻지 않느냐며 그레이스가 날이 선 듯 예민하게 말을 던진다. 이미 그녀 앞에 식은 한잔의 차가 있었으니 남편이 묻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말없이 아내에게 차를 마실 거냐고 묻고는 차를 끓인다. 이후 부부의 대화는 명령하는 아내와 자의식이 없는 로봇처럼 순응하는 남편 사이에 미끄러지는 대화의 반복이다.
심지어 아들 제이미(조쉬 어코너)조차도 엄마의 강한 기세에 눌려 집에 들르는 것을 꺼린다. 독실한 신자인 그레이스에게 사랑은 변하지 않는 약속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이 그녀를 가둔다. 서로가 다른 부부의 29년 세월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틈’은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것의 시작이 결혼의 실존적 전제 조건이라면 에드워드와 그레이스의 다름은 그리 문제가 될 조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줄타기같이 아슬아슬했던 결혼은 일순간에 파탄 난다. 그레이스의 기세에 힘들었던 에드워드는 ‘안젤라’라는 여성과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집을 떠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레이스는 절대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에 상처를 낸 남편의 뺨을 때리고 식탁을 엎는 난장을 쳐보아도 남편은 무덤덤하게 지켜볼 뿐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꿈꾸었던 그레이스만의 낭만적 상상력은 무너지고 버림받은 여성의 시련이 시작된다.
자기의 새로운 사랑을 찾아 그저 단촐하게 가방 하나만을 들고 집을 떠난 뒤 집으로 온 아들도 사사건건 자신을 간섭하려고 드는 엄마가 역시 버겁다. 그럼에도 아들 제이미는 난관에 처한 부모의 틈 사이에 선다. 부모보다 의젓한 아들이다. 아무리 제이미가 설득을 해도 그레이스는 쿨하게 남편을 놓아줄 수 없다.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이 믿어온 사랑의 신념을 배신당한 것이 못 견딜 만큼 자존심 상하고 비참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믿는 사랑이 아직도 옳다고 신앙처럼 철석같이 믿어서일까? 그레이스는 남편에게 전에 없었던 애걸과 설득도 해 보지만 마음이 떠난 남편은 단호하다. 마침내 그레이스가 남편을 놓은 장면은 안젤라에 의해서이다. 막무가내인 그레이스에게 안젤라는 침착하게 말한다. “불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두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한 한 사람이 남았을 뿐”이라고... 현실을 깨달은 그레이스가 그 집을 조용히 떠난다.
이제 혼자가 된 것을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그레이스가 쓸쓸하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을 때 아들이 엄마에게 말한다. 어머니가 걸어가는 그 힘든 여정이 그 뒤를 따라가는 자신에게 귀감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이혼이 세상의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 곁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니 삶과 죽음의 경중이 별거 아니었다는 예이츠의 시처럼 사랑이 끝났다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레이스는 미뤄왔던 시선집의 편집을 다시 시작한다. 혼자서 하던 아날로그식이 아니라 아들의 도움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 독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또한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고통을 밑거름으로 자살을 꿈꾸는 다른 여성이 일어설 힘을 주는 자원봉사자가 된다. 명령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나만 아프다고 울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어주는 사람이 된 그레이스는 떠난 반쪽의 공간에 세상 사람을 들인다.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간 그레이스에게 이혼의 고통은 성장통이었다. 사랑은 내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기보다 네 말을 들어주었을 때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