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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Oct 12. 2023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낯선 너: <드라이브 마이 카>

   영화의 시작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안 온다면 오늘 낡은 끈 때문에 실패한 목멤을 내일 실행하기로 하지만 만약 ‘고도’가 온다면 살게 된다는 말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려 40분간의 프롤로그를 거쳐서야 영화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특이한 구성을 가진다. 이 40분에서 중요한 사건은 주인공 가후쿠(니지시마 히데토시)의 늦은 도착 때문에 구하지 못한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다. 가후쿠와 오토는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린 딸을 잃은 아픔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다. 그 이후로, 배우였던 아내는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대신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세상에 내어 보내지는 것이다. 잉태와 출산이 그러하듯 이야기도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다. 특이하게도 아내는 남편과 성관계 후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하고 그 다음 날 깨어나면 잊어버린다. 같이 출근을 하는 사이 운전을 하는 가후쿠가 조수석에 앉은 아내에게 간밤에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오토는 드라마 시나리오를 쓴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의 블라디 보스톡에 가는 출장 계획이 바뀌게 되고 가후쿠는 의도치 않게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장면을 보게 되지만 못 본 척, 아내에게 감정을 자제한 채 침묵한다. 어느 날 “할 얘기가 있으니 일찍 집에 올 수 있냐“는 아내의 말에 기후쿠는 아내가 사실을 털어놓으면 아내를 잃을 두려움에 일부러 늦게 집에 도착하였고 아내는 지주막하출혈로 죽어있었다. 자신이 늦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었다는 죄책감과 아내가 왜 다른 남자와 외도를 했는지에 대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통과 아내를 보낸 아픔이 가후쿠의 마음에 돌처럼 얹힌다. 이제 잃어버린 딸아이를 대신할 이야기의 잉태와 출산도 끝이 났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에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가로 초정된다. 가후쿠는 오래된 자신의 빨간 터보차를 굳이 그곳까지 운전해서 오지만 그곳의 규칙상 연출가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만 탈 수 있어 미사키(미우라 토코)라는 여성이 임시 운전사로 고용된다. 차의 뒷 자석에서 가후쿠는 자신의 루틴대로 예전 오토가 소냐역을 맡아 녹음한 테이프를 작동시켜 바냐 대사를 반복 연습한다. 

 진행형의 동력이 느껴지는 타이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중요한 것은 어쩌면 ‘고도’보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의 동반일 것이다. 영화는 아내의 동반이 깨진 자리에 다른 여성들을 들여놓는다. 감독은 끝내지 못한 아내와의 이야기를 마치게 한다. 그래야 가후쿠의 새로운 삶,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내의 불륜 상대였던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가 가후쿠의 차를 타게 된다. 그가 가후쿠에게 오토의 생전에 들었던 ‘칠성장어와 소녀’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야기를 전달한다. 드디어 내내 미완성있던 오토의 이야기가 완성되었고 가후쿠는 그제서야 자신의 주위를 망령처럼 떠돌던 오토로부터 풀려난다. 

 이제 아내의 죽음의 무게로부터 가벼워진 가후쿠가 아내가 앉았던 운전석 옆의 조수석으로 옭겨 앉고 두 사람은 차의 루프탑 위로 담배를 잡은 두 손을 동시에 올린다. 가후쿠의 잃어버린 어린 딸이 자랐으면 되었을 나이 23살의 미야키는 부활한 딸처럼 돌아왔다. 아내와 만들었던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딸과 아빠가 엮어내는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다. 

 그렇지만 늘 어딘가 어둡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미야키도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술집을 하면서 늦게 귀가하던 엄마가 일터로 오고 가는 편의를 위해 엄마에게 운전을 배웠지만 엄마는 차 안에서 자신의 잠을 깨우기라도 하면 미야키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던 모진 엄마였다. 산밑에서 살고 있던 그녀들의 집이 산사태로 매몰되었던 날, 미야키는 다행히 빠져나왔지만 엄마를 구할 수는 없었다. 미야키의 고향인 추운 홋카이도에 도착했을 때 미야키는 자신이  폐기물 처리장으로 가후쿠를 데리고 간다. 어디선가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더러운 폐기물이 된 잡동사니들이 분쇄되어 하얀 눈처럼 흩어지는 처리장의 풍경을 좋아했던 미야키는 그제서야 엄마가 죽었던 장소에 꽃다발을 놓고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는다. 그때 가후쿠가 미야키에게 말한다. “살아 남은 자는 죽은 자를 기억해. 어떤 형태든 그게 계속되지. 나나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그제서야 가후쿠는 그가 의도적으로 피했던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 

  히로시마의 리허설 중,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 역을 맡은 이유나(박유림)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로 인해 수어와 표정만으로 연기한다. ”힘들지 않느냐“는 가후쿠의 질문에 이유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흔한 일이이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부족한 말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집중과 공감의 마음이다. 

  자신을 닮은 것 같아 회피했던 바냐의 역할을 맡아 드디어 가후쿠가 무대에 선다. 그리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휙 공간 이동을 하여 활기가 넘치는 부산이다. 가후쿠가 물려준 빨간 차와 이유나가 데리고 있던 골든 리트리버를 옆에 태우고 밝은 얼굴로 미야키가 부산 거리를 달려간다. “우리가 삶을 다 끝내고 돌아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이 아직 오지 않은 고도일지도 모르지만 더 귀한 지상의 선물은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넘겨준 선물이다. 이제 미야키가 바톤을 이어받아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처럼 현재 진행형의 이야기가 무대의 희망으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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