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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Oct 12. 2023

너의 고통을 구해 나의 고통을 구하다: <랜드>

  <랜드>에서는 아픈 사람의 상처가 아물기를 기다리며 말없이 오랜 시간 지켜보던 한 남자가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한 여자를 구한다. 진부하리만치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랜드>는 압도적인 록키의 영상미와 함께 상처받은 남녀의 따뜻한 소통과 위로를 담담하게 화면에 담는다.

  이디(로빈 라이트)는 총기 난사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어떤 말로도 헤아릴 수 없는 극심한 고통으로 괴로운 이디에게는 곁에서 “제발 자신을 다치지 말라”며 안타까워 하는 여동생의 위로마져도 모진 고문이 된다. 자포자기에 빠진 이디는 도시를 영영 떠나고자 한다. 길거리 쓰레기통에 내팽개치듯 핸드폰을 던져 넣고 광활하고 거친 아이오와 깊은 산중으로 들어온다. 세상과의 차단을 위해 타고 올랐던 차와 트레일러도 그곳까지 안내했던 사람에게 견인해 가도록 부탁한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온 극단의 마음이 보인다.  

  그러나 세상을 등진 대가는 혹독하다. 도시에서 겪었던 마음의 고통은 여전했고 게다가 육체적 고통이 산중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동안 잠시라도 슬픔은 잊혀졌고 더없이 아름다웠던 봄, 여름, 가을까지는 자급자족의 꿈을 꾸어 볼 만 했다. 그러나 겨울이 온 것이다. 그것도 그 광활한 아이오와 깊은 산중에. 그러나 아무리 배고파도 새끼 옆에 있던 어미 사슴에 겨누던 총구를 울며 내려놓는 이디. 어미 없이 남을 어린 생명이 불쌍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남은 자신이 슬퍼서 운다. 

  이디가 준비한 것은 한 박스 정도의 참치 캔과 음식 그리고 몇 벌의 옷들 뿐. 게다가 혹독한 겨울과 눈보라를 뚫고 거대한 곰이 나타나 장난감처럼 집을 부수고 쟁여놓은 캔마져도 먹어치우고 분탕질을 치고 떠났다. 목숨을 부지할 음식으로 한 마리 토끼를 잡을 줄도 그리고 그 무시무시한 산속에서 부는 눈바람에 얼어 죽지 않아야 할 땔감,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그녀는 탈진한 채로 서서히 의식을 잃어간다. 죽음 대신 산을 택한 건 삶에 대한 애착 때문도 아니었다. 이디의 옆을 지킨 여동생 때문이었으니 죽음과 함께 그녀의 고통도 끝마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위기를 지나가던 사냥꾼 미겔(데이안 비쉬어)이 발견한다. 겨울 사냥에 나서곤 했던 그는 이 오두막에서 간간 피어오르곤 하던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문을 열고 죽음의 목전에 있던 그녀를 발견한다. 마을에서 급히 간호원을 불러와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이디는 마을로 내려가기를 완강하게 거부한다. 결국 미겔이 가끔 그녀에게 들러 사냥을 위한 총쏘기와 덫놓기 등 자급자족에 필요한 생존 방식을 하나씩 가르쳐주면서 산에 적응해 가도록 돕는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는다. 질문은 관심이 아니라 상처를 헤짚는 것임을 알기에. 고통스러운 사람만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 “왜 나를 돕느냐”는 그녀의 질문에 그는 “내가 가는 길에 당신이 있었을 뿐이다”라고 답할 뿐이다. 

  변하지 않는 삶이 없듯 그들의 관계도 서서히 끝이 나게 된다. 미겔의 방문이 뜸해진 어느날 그가 커다란 반려견을 이디에게 맡긴다. 그리곤 미겔의 어린 조카가 그렸다는 그림을 선물하자 불현 듯 생각난 듯 이디가 오두박 선반 위 박스안에 넣어두었던 어린 아들의 그림을 조카에게 전해달라며 미겔에게 건넨다. 그러나 그 이후 시간이 오래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그가 걱정된 그녀는 단단히 준비한 배낭을 짊어지고 반려견과 함께 길고 긴 산길을 걸어 마을로 내려온다. 미겔이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게 한 것이다.

  마을에서 이디를 기다리는 건 또 다른 이별이었다. 말기 후두암으로 미겔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슬픈 소식이다. 이디가 찾아오자 미겔은 인디언 원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침대에서도 슬픔을 일시에 웃음으로 바꿔놓는다. 간호원과 이디가 미겔을 찾아 올 것일지 아닐지를 내기 했는데 자신이 이겼다며. 사랑이었을지도 모를 우정의 끝이 슬프고도 아름답다.

  웃음 뒤에 미겔이 고해성사를 하듯 그녀에게 자신을 그토록 괴롭게 했던 죄책감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취중운전으로 인한 사고 때문에 가족이 죽었다고. 그저 “가는 길에 있어” 위험에 처한 이디를 도왔던 미겔의 선행이 그를 구원한다. 남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신비는 기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이야기이다. 이디가 미겔의 손을 잡았던 것도 잠시, 미겔이 산으로 다시 향하는 이디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이디의 손에 쥐어준다. 그 핸드폰에는 산중 고요한 시간에 이디와 미겔이 앉아 낮은 소리로 부르던 노래가 담겨있다. 추억은 잊는 것이 아니라 늘 함께 하는 것이라는 위로를 담아. 오두막으로 돌아온 이디가 연락을 끊었던 여동생에게 전화를 건다. 엔딩에서 흐르는 ‘So you remember me’의 가사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기억하는 한 죽지 않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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