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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an 21. 2021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우리들의 집은 어디일까?

어른들은 몰라요, 아이들의 세계를

 지금은 ‘아쉬가르 파라디’ 하면 유명 이란 영화 감독이라는 등식이 바로 떠오르지만 파라디 보다 삼십 여 년 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 영화를 세계적 무대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암으로 투병하다 76세에 사망하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문화 종교, 생김새들이 모두 다르지만 삶의 근본 문제는 하나다”라고 말한 키아로스타미의 말처럼 그의 영화는 이란 보통 사람들의 삶을 세상의 보편적인 삶으로 녹여내었던 거장이었다. 그러한 영화중의 하나가 바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올리브 나무사이로’와 ‘그리고 삶은 계속 된다’와 함께 키아로스타미의 삼부작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앞서 키아로스타미가 피력했던 바대로 이란의 소박한 시골 풍경과 평범한 이란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통해 우리의 향수를 일깨우고 나아가 삶의 근본적인 목적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는 이란의 코케르라는 마을의 초등학교 2학년생인 아마드가 실수로 잘 못 가지고 온 짝꿍의 숙제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서 친구의 집을 찾기 위해 애쓰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왜냐하면 오늘 숙제 공책이 아닌 다른 연습장에 숙제를 해왔던 짝꿍인 네마자데가 선생님한테 혼나서 울었고 이 숙제 공책에 숙제를 하지 못하면 내일 또 네마자데가 선생님한테 혼나고 울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퇴학까지 시키겠다고 선생님은 엄포까지 놓았던 차이다. 얼핏 보자면 이 영화 이야기의 중심은 숙제 공책을 돌려주기 위해 친구의 집을 찾는 과정 같지만 키아로스타미가 되짚고자 하는 것은 친구가 내일 다시 혼나고 울지 않기를 바라는 아마드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는 친구의 집을 무작정 찾아나서는 우정 어린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평범하기 그지없고 살림은 그리 넉넉지 않아 보이는 한 이란 시골 가정의 어린 아이의 이야기가 어떻게 삶의 근본적인 목적으로 우리를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우선 이 영화에서 아마드가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과정은 집 찾기를 방해하는 어른들의 마음 안에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고집스런 벽을 헤쳐 나가야 하는 고난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어떤 사람도, 어떠한  환경도 절대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것이 아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까지 이끌어나가야 하는 힘든 삶에 지쳐 그런 모습들로 변했을 것이다. 그들 중 한 명인 아마드의 엄마는 아마드에게 숙제를 먼저 하라고 닦달해대지만 계속 아마드에게 자잘한 집안 심부름을 시키고 잔소리를 해대니 아마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는 곤혹함에 허둥댄다. 이 난감한 상황은 마치 부조리극처럼 계속 어긋나는 모자간의 대화의 반복에서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엄마는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이제 갓 태어난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벅찬 가사 노동에 정신이 없다. 또한 아마드의 할아버지는 자신이 과거에 받았던 폭력적인 훈육이 사람을 바르게 한다는 기억의 미화 때문에 아마드가 처한 상황은 아랑곳없이 자기 주머니에 담배가 있는 줄 번연히 알면서도 아마드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킨다. 선한 의도가 아이에게는 폭력이 된다. 이렇듯 아마드에게 최악도 사람이고 최선도 사람이 되는 블랙 코미디 같은 것이 이 영화가 주는 또 하나의 매력이다. 

  고난에서도 웃음을 끌어내는 블랙코미디의 역설성을 키아로스타미는 이 영화에서 한껏 이용한다. 요즘말로 '웃픈'이라고나 할까? 예를 들면 무서운 엄마의 시선을 피해 숙제 공책을 옷에 숨기고 살금살금 몰래 나가는 아마드의 긴장감과 지그재그로 난 높은 언덕길을 달려 오르는 힘겨움은 장난스럽고 경쾌한 음악으로 인해 훨씬 가벼운 느낌으로 이완된다. 그리고 자기의 체구보다 더 큰 나무더미를 얹은 지게 때문에 가려진 노인의 뒷모습은 마치 옆으로 크게 퍼진 한 그루의 나무가 뒤뚱뒤뚱 걸어가는 것 같은 모양새로 연출되면서 노인이 겪는 힘든 삶의 애환을 웃음으로 뒤집는다. 이것이 “인생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보인다”는 키아로스타미의 철학을 대변하는 이미지일 것이다. 삶은 동전의 양면과 같으니까.

  이 영화에서 보자면 어른들의 안하무인, 무관심, 고압적 자세는 아마드의 친구 집 찾기를 방해하는 것 같지만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마드의 집찾기를 도와주는 조력자 노릇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포시테에서 한 아줌마가 널다가 떨어뜨린 빨래를 지나가던 아마드에게 올려달라고 한다. 그래도 아마드의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한 이 아줌마 행위의 결과는 나쁘지 않다. 가까스로 아줌마에게 빨래를 올려주는데 그 집이 같은 반 아이인 모르데자의 집인 것이다. 모르데자는 네마자데의 사촌인 헤마티의 집을 알려주고 부지런히 그 집을 찾았지만 헤마티는 조금 전 아미드가 출발한 코케르로 갔다고 한다. 술래잡기도 이런 황당한 술래잡기가 없다. 

  또 한사람의 조력자가 있었으니, 안하무인 문짝 제조공이다. 평생 변치않는다는 철문 세일을 하느라 이 제조공은 남의 말은 전혀 듣지않고 자기말만 해댄다. 심지어 아마드에게 그리도 소중한 친구의 공책을 자기 상품 설명하는라 한장 찢기도 한다. 그런데 이 상인의 성이 네마자데! 노새를 타고 언덕을 오르는 상인을 따라 아마드가 죽어라하고 달려가보니 네마자데라는 아들은 내 친구가 아니다. 아이말로는 네마자데는 흔한 이름이라나. 그런데 이 아들이 친구 네마자데의 집을 알려준다. 비록 내 친구의 집은 아니었지만 우연의 신은 아마드를 버리지 않는다. 거의 포기에 가까운 이 시점에서 마치 하늘이 내려준 예지의 인물같은 노인을 만나게 되니 말이다

  아마드의 친구 집 찾기 상황의 반전은 이후 이 집에서 한 노인을 만나면서 부터이다. 지금까지 미로를 헤매고 문틈으로 남의 집안을 보았다면 이 지점부터 아마드는 반환점을 돌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반대의 행보를 하게 된다. “하루 종일 찾았는데 모두 그 애를 몰라요”라고 말하는 아마드에게 노인은 아마드의 동반자가 된다. 이 노인은 지금까지  아이의 말에 귀를 닫았던 어른들이나 아마드가 '어디에 있었는지'만을 궁금해하며 과거에 매달리는 친할아버지와는 달리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아마드가 왜 친구의 집을 찾는가를 묻고 대답을 들어주고 함께 집을 찾기 위해 동행하는 인물이다.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두 사람은 친구나 다름없으니 아마드의 내 친구 집 찾기는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할아버지가 아는 네마자데는 아마드의 친구가 아니었다. 숙제 공책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낙담과 빨리 빵을 사러가야 하는 아마드의 복잡한 마음과는 달리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끝이 없고 노쇠한 노인의 걸음걸이는 느리기 그지없다. 아마드는 급한 마음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려고 길을 오르지만 갑자기 부는 세찬 바람과 어둠속에서 짓는 개들이 무서워서 다시 할아버지에게 돌아간다. 아마드와 함께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아마드에게 “이제 혼자 가거라 내가 지켜볼테니”하며 아마드를 혼자 집으로 돌아가게 한다. 

  결국 숙제 공책을 돌려주지 못하고 돌아온 아마드는 친구가 내일 또 선생님한테 혼나고 울게 될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 저녁조차 먹지 않는다. 아마드의 무거운 마음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아버지는 낡은 라디오만 붙들고 있고 낮에 그토록 말이 많았던 할아버지는 멍하니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사이 낮동안에 아마드를 힘들게 했던 엄마는 배고플 아들에게 슬며시 빵을 놓고 간다. 잠을 자야하는 어른들을 피해 건너 방으로 간 아마드가 숙제를 하려고 하는 그때, 갑자기 세찬 바람이 아마드가 있던 방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친다. 이때 방안에서 방밖을 보는 아마드의 얼굴 표정이 클로즈 업 된다. 이 순간이 하루 종일 마을 사람들의 집 밖에서 네마자데의 집을 묻던 아마드가 집안에서 집밖을 보는 주체가 되는 상징적 지점이다.

  비록 작은 방이지만 아마드는 그 방의 열린 문을 통해 보이는 마당의 풍경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지금 마당에는 바로 몇 시간 전 어느 할아버지와 걷던 밤길에서 불던 세찬 바람이 불어대고 마당의 빨랫줄에는 엄마의 고단한 손길이 머문 빨래가 있다. 빨래가 바람에 날릴 새라 급히 빨래를 걷는 엄마의 삶도 아마드의 눈에 잡힌다. 그렇지만 영화는 아마드 얼굴의 표정을 클로즈업한 화면만을 보여줄 뿐 아마드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를 생략한 채 관객에게 해석의 공백을 남긴다. 이 공백은 이 영화의 마무리에서 벌어진 교실에서의 반전 상황에 아마드의 어떠한 마음이 그토록 예쁜 생각을 하게 했을까를 질문하며 아마드의 마음읽기를 시작 하도록 감독이 관객에게 남겨두었던 배려의 공간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다음날 교실의 분위기는 어제와 다름없다. 숙제 공책이 없었으니 아마도 또 다른 공책에 숙제를 해왔을 네마자데는 두려움으로 거의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이 되어있었고 어제와 다르다면 짝꿍인 아마드의 자리는 비어있는 것이었다. 숙제 검사가 막 시작되었을 때 아마드가 조금 늦게 교실에 들어온다. 자리에 앉은 아마드는 겁을 먹고 울상이 되어있는 네마자데에게 “내가 네 숙제 해왔어”라고 말하며 조용히 네마자데의 숙제 공책을 건네어준다. 네마자데의 숙제 공책 갈피에는 하루 전날 만난 할아버지가 건네 준 작은 한 송이 꽃이 끼워져 있었고 ‘잘 했다’는 선생님의 싸인이 남겨진 네마자데의 공책이 클로즈업되며 영화는 마무리가 된다. 결국 칭찬은 아마드의 고운 마음에 대한 것이다. 아이들의 세상이 어른들의 세상에 한 송이 꽃이 된다.

  짐작컨대 공책을 돌려주지 못해 걱정이 가득한 아마드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집 마당의 풍광일 것이다. 비록 너와 나의 집이 멀리 떨어져 있거나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집은 밤이면 고단한 삶, 그로인해 서로가 무심하기도 했던 가족이 다시 모이고 저녁을 먹고 갑자기 바람이 불면 마당에 널린 빨래를 걷는 것처럼 자연의 시간과 순리에 순응하는 일상적 삶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친구가 더 이상 울지 않도록 찾아야 하는 친구의 집은 아마드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아마드의 집에 네마자데의 숙제 공책이 있으니 이제 아마드가 할 일은 친구의 숙제 공책에 숙제를 해 넣는 것이다. 영화에서 아마드가 한 실수의 시작은 둘의 공책이 똑같다는 것이다. 똑같은 공책처럼 삶을 안고 있는 집 또한 네 집과 내 집으로 나눌 수 없이 닮아 있으니, ‘내 친구의 집이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집은 너와 나의 집이 아니라 ‘우리들의 집’이라는 깨달음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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