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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Jun 23. 2021

영화 <더 파더>:젊은날은 영원할까요?

기억할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플로리안 젤러가 연출한 ‘더 파더’의 주인공인 80대의 노인 안소니(안소니 홉킨스)는 홀로 살며 자신이 가꾸어 온 고급스럽고 안락한 집에서 무료하지만 나름 평온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치매로 인해 지금까지 굳건하게 지탱해 오던 그의 삶이 여지없이 무너지고 뒤엉킬 뿐만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되어가는 혼란과 두려움의 과정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더 파더’의 매력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안소니 홉킨스와 올리비아 콜맨의 뛰어난 연기력을 빼놓을 수 없지만 더욱 신선한 것은 영화가 이야기에 기대는 것보다 안소니의 혼란과 고통을 관객조차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치밀한 연출 방식에 있다. ‘더 파더’는 큰소리 한 번 없는 조용한 대사와 정적 분위기가 이끌어 가는 영화이지만 ‘혼란’이라는 언어가 함축하듯  인물과 시간 그리고 공간이 만들어내는 변주와 긴장감은 ‘더 파더‘를 역동적으로 이끄는 중심이 된다. ’더 파더‘는 유난히 전체 혹은 다양한 각도로 바꾸어 가며 집의 내부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우아한 색조로 어우러진 거실의 가구들은 정갈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고 벽에 걸린 액자들은 반듯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작은 색조 타일로 벽이 장식된 부엌과 선반의 유리병들은 질서있게 자리를 잡고 있다. 문제는 안소니의 집과 함께 영화의 배경이 되는 딸 앤의 집의 구조가 흡사한 것에 있다. 이 유사성이 그토록 자신의 공간을 지키려는 안소니에게 혼란을 증폭시킨다.     



 

 ’더 파더‘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소재의 하나는 ’집‘이다. 안소니와 앤의 집은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하며,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스크린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진짜이고 진실인지 생각할 시간조차 관객에게 허락하지 않는다.(위의 두 스틸을 보면 언뜻 같아 보이지만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소파의 배치나 색상, 오른쪽 탁자위에 놓인 스텐드의 색깔, 소파 옆 탁자의 체스판 등...)  이러한 방식으로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안소니의 착각이나 혼란을 함께 따라가게 한다. 비록 혼자 살지만 좋아하는 클래식을 듣고 차를 만들어 마시는 일상을 즐기리만치 안소니에게 편안하고 익숙했던 집이 언제부터인지 낯설어지기도 하고 심지어 앤의 돌봄을 받고 있는 안소니는 자신의 집을 탐내는 앤과 사위인 폴(루퍼스 스웰)이 자신의 집을 빼앗으려고 한다고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그 집이 결혼한 지 10년이 되는 자신들의 집이라고 주장하는 폴은 자신들의 생활에 짐이 되는 안소니에게 언제 이 집을 떠날 것이냐고 차갑게 물으며 안소니를 당혹케한다.  심지어 폴이라고 주장하는 다른 낯선 사람(빌/마크 게티스)이 나타나 폴이 한 이야기를 똑같이 반복하는가 하면 안소니의 뺨을 때리기도 하니, 안소니의 두려움과 혼란은 더욱 커진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시장에 다녀온 낯선 여자(캐서린/올리비아 윌리엄스)까지 등장해서 자신이 앤이라고 하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를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이런 혼란을 함께 겪는 관객은 그래도 정상적인 앤과 폴의 말을 믿게 된다. 앤이 어렵사리 간병인을 구하지만 번번이 낯선 간병인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혹은 간병인들이 시계를 훔쳤다고 의심하는 아버지의 강박증 때문에 잠시 자신의 집에 모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와중에 앤은 남편 폴이 차고 있는 시계가 자신의 시계인것 이라고 의심하리만치 두서없는 아버지의 치매와 그런 상황에 짜증이 나있는 남편 사이에서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으로 인해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아버지를 돌보는 일로 자신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는 앤이다. 그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안소니가 정상이 아니니 요양원에 보내자는 폴과 요양원보다는 간병인을 구해보자고 하는 앤 사이의 언쟁을 안소니가 우연히 듣게 되는 장면이다. 치매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주변 사람과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안소니가 자신이 딸 부부 사이의 분란의 원인이 된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안소니의 표정은 망연해진다. 식탁에는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그 두 사람의 상황에 들어갈 수 없었던 안소니는 뒤로 돌아 자신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다.      


  어쩔 수 없는 자연 현상인 노화와 알츠하이머로 인해 자신이 가족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짐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두려움과 자괴감은 어떠할까? 결국 안소니는 바깥 세상을 피해 점점 더 자신만의 공간으로 도망치듯 뒷걸음치게 된다. 안소니의 유일한 위안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방에서 헤드폰으로 혼자 조용히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안소니가 주로 듣는 음악은 비제의 ’진주조개잡이‘ 중에서 나오는 아리아 ‘귀에 익은 그대 음성’이다. ‘추억을 그리워하며 마음만으로도 그대를 볼 수 있다’는 노래의 의미와는 달리 기억은 뒤섞이고 아무것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안소니의 대조적 상황으로 인해 낮고 느리게 흐르는 노래의 선율은 더욱 서글프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기억을 잊는 것보다 더욱 슬픈 치매의 증상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조차 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게 되는 것일 것이다. 안소니에게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딸은 앤 뿐이지만 앤에게는 루시라는 여동생이 있었다. 짐작컨대 앤보다 편애했던 등장하지 않는 루시를 못내 그리워하는 안소니는 새로 온 젊은 간병인 로라(이모겐 푸츠)를 루시를 닮았다며 좋아하고 그녀 앞에서 탭댄스를 추며 재롱을 떨기도 한다. 또한 안소니는 로라에게 루시는 해외에 있다는 등, 왜 요즘은 통 들르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등 루시의 거취에 대해 수다스러울 정도로 이야기한다. 그런데 어느 날 잠을 자던 안소니는 잠결에 환청처럼 계속 아빠를 찾는 루시의 소리를 듣고 루시를 찾아 복도를 이리저리 헤맨다. 그곳에서 안소니는 심하게 다쳐 누운 루시가 ‘아빠’를 향해 고통스런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본다. 루시는 이미 사고로 죽었던 것이었다. 사랑하는 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싶은 마음은 일어난 일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예를 들면 안소니는 거실의 벽에 걸린 붉은 발레복을 입은 발레리나가 그려진 커다란 액자는 루시가 그린 것이고 현재는 해외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자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반복한다. 어느 날 그 벽의 액자가 사라지고 책장의 책들도 치워진 빈 책장과 빈 방 그리고 가구가 치워진 썰렁한 거실이 보여진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안소니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집에서 삶의 흔적들이 치워지고 루시에 대한 기억을 담은 그림조차 사라진 집의 정적은 이제 안소니가 이 집을 떠나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앤이 파리에서의 자신의 새 삶을 위해 아버지를 떠나게 되고 안소니가 요양원에 위탁되는 것은 스웨터 입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버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앤이 아버지를 도와 옷을 입히고 나서 예상된다. 이때 지금까지 아버지를 위해 애써온 딸에게 아버지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앤, 모든 것에 고마워”라고 말한다. 그런 아버지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딸의 침묵 어린 표정 속에는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아요’라는 대답이 들어있는 듯 하다. 딸에게 심통에 가까운 고집을 부리고 심지어 자기 집을 탐내는 딸로 의심하던 아버지였지만 모든 것이 아버지의 뜻이 아니었음을 어찌 사려 깊은 앤이 모를까. 딸이 이제 자신의 곁을 떠날 때가 되었음을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와중에도 예감한 안소니의 이 한 마디는 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작별의 인사 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를 요양원에 위탁하고 울며 요양원을 나서는 앤의 모습과 함께 규칙적인 건물들이 이어져 있어 삭막해 보이기조차 하는 요양원 건물 앞의 빈 정원 중앙이 화면에 크게 잡힌다. 그 한 가운데 커다랗게 전시된 기울어지고 깨어진 얼굴의 조각이 보인다. 안소니의 깨어진 삶처럼.     


  감독의 복잡하고 정교한 연출에 의해 거의 영화의 종반부까지 관객은 뒤엉킨 안소니의 혼란을 함께 경험한다. 결국 허름한 요양원의 방에서 낡고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 안소니를 보고서야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안소니가 기억하고 왜곡한 과거의 일들인 것을 알게 된다. 이 방에도 안소니가 기억했던 집의 방과 비슷하게 창문과 옷장이 있고 그 사이 코너에는 전신 거울이 있다. 벽에는 소년이 그려진 그림이 걸려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안소니가 기억했던 안소니의 집과 방은 실제 했던 것일까? 아니면 실제 했더라도 얼마만큼 실제에 근접한 것일까? 이런 의문은 이 요양원의 간호사인 캐더린과 빌의 등장과 함께 더욱 심해진다. 안소니의 기억속에서 캐더린은 시장을 보고 온 앤으로 그리고 빌은 앤의 남편인 폴로 나타나서 안소니를 심한 당혹감으로 몰아넣었던 인물들인 것이다. 현재와 과거는 뒤엉켜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고 그래서 기억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안소니가 번번이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는 시계를 강박증적으로 찾았는지 모른다. 기억은 곧 켜켜이 쌓인 시간과 경험의 흔적이므로...   



   영화의 종반부에서 안소니의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 만큼(“그럼 나는 누구지?”) 소실되고 자신의 집과 가족조차 잃어버린 채  홀로 요양원의 방에 남겨져있다.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온 이후, 수평적 시간을 따라 살며 가족을 이루고 집을 가꾸며 사회적으로는 성장을 하였던 안소니의 시간은 완전히 비워졌다. 비워진 안소니는 이제 떠나온 엄마를 그리워하는 어린아이의 시절로 돌아간다. 마치 고향을 그리워하는 나그네처럼.  고립된  방의 창문 밖 나무를 보고 자신이 떨어지는 나뭇잎과 같다고 하며 “엄마가 보고 싶어. 여기서 나갈래. 누가 날 좀 데려가 줘요. 집에 갈래“라고 애처롭게 우는 어린아이가 된 안소니의 모습은 관객의 마음에 절절한 슬픔을 일으킨다. 우는 안소니에게 캐서린이 ”왜 그러냐”고 묻자 안소니는 “내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바람인지 비인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통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캐서린은 한 팔을 둘러 안소니를 가슴에 안고는 ”다 괜찮아져 아가야“라고 도닥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우는 안소니에게 산책을 하자며 따스하게 달랜다. .    

  

 

  이렇게 조용한 지상의 천사는 어쩔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이기적 선택이 버린 수많은 안소니를 지금도 품에 안고 그들의 잃어버린 집이 되어 있는 것이다. 컴퓨터처럼 치밀하게 이야기와 화면을 오리고 붙이면서 치매환자의 혼란을 실체의 경험으로 옮긴 ‘더 파더’의 감독이 관객의 정서적 감동과 반성을 의도하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의 끝 장면을 본 관객의 일부만이라도 우리가 밀쳐놓은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고마운 이들의 숨은 수고를 다시금 기억하지 않았을까? 더불어 잊었던 것을 다시금 기억할 수 있는 우리의 현재 삶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면 ‘더 파더’의 뒤끝이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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