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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Nov 04. 2021

<카모메 식당>리뷰

치유의 맛들

  

코로나가 함께 밥 먹고 이야기하고 웃는 우리의 삶을 삭막한 거리두기, 차가운 플라스틱 가림막으로 차단했던 시간도 끝났다. 비록 끝이 ‘진행형 끝’이라는 애매한 상황이지만 다시 친구와 가족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오늘이 얼마나 따뜻한 일상의 선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없다. 그저 우리는 시간의 물살을 타고 여행을 하면 될 일인가 보다. <키모메 식당>의 세 여성이 뭔가 작정한 바 없는 여행을 떠나 더 행복하고 더 넓은 세상을 만났듯이 말이다.     


  <카모메 식당>의 주인공은 음식이 아니라 세 여성이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세 여성은 익숙함을 박차고 나와 멀고 먼 낯선 나라 핀란드로 향했다. 각자 떠남의 동기와 시간은 달랐지만 그들은 우연히 카모메 식당에 모이고 음식을 나누어 먹고 서로 위로와 도움을 나누며 한 식구가 되어간다. 핀란드어로 ‘카모메’는 갈매기를 의미한다. 바닷가 갈매기들이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사치에의 독백이 들린다. “난 통통한 갈매기를 좋아한다”고. 처음에는 생뚱맞게 들렸지만 영화가 끝날 무렵 그 말의 의미를 짐작하게 되었다. 주위 사람을 품는 것은 넉넉한 사람들의 마음이라는 것을.     



  사치에(고바야시 사토이)는 핀란드의 헬싱키 한 작은 마을에서 소박하고 정갈한 ‘카모메 식당’을 운영한다. 그러나 문을 연지 한 달째가 되어 가지만 손님의 발길은 전혀 없고 매일 그 식당 앞을 지나가는 동네 삼인조 할머니들은 유리를 통해 보이는 작은 동양인 사치에가 어린애임이 틀림없다고 수근댄다. 그런 상황에는 아랑곳없이 늘 정갈하게 유리잔을 닦고 있는 사치에는 그녀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작고 연약해 보이고 상황의 심각성도 모른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사치에는 마음과 몸이 강한 여성이다. 몸은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배운 무술로 단련되어 강인하며 정신은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랑하고 지켜내는 주관이 뚜렷하다. 

     

  식당 오픈을 마음에 두었던 그녀가 핀란드행을 결심한 것은 핀란드 사람들이 일본인들처럼 연어를 좋아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엉뚱하지만 단순한 결정력이 행동력을 만들고 삶의 변화를 이끌어낸다. 식당의 음식도 단순하다. 일찍 엄마를 잃고 아버지와 살았던 사치에는 엄마 대신 집안일을 해내야 했지만 소풍 날만큼은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 싸주었던 오니기리(주먹밥)의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오니기리가 엄마의 비운 자리를 채워주었던 음식이듯이 자신의 식당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러 허기를 채울 수 있는 편안한 식당이 되기를 바라지만 오니기리는 핀란드 사람들에게는 낯설 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사치에는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다.     

  카메모 식당에 처음 들른 손님은 토미(자코 니에미)이다. 비록 커피 한 잔만을 시킬 뿐이었지만 그는 일본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티쳐츠를 늘 입고 다닐 정도로 일본 만화 광팬이다. 그는 일식당의 주인은 혹시 자기가 궁금한 한 만화 ‘갓차만’(독수리 오형제)의 주제가를 알고 있을까 하여 카메모 식당에 들어섰지만 사치에도 알 듯 말 듯 머릿속에 맴맴 돌 뿐이다. 답답한 마음에 들른 책방에서 우연히 일본 책을 읽고 있던 미도리(카타기리 하이리)에게 도움을 청하니 미도리는 주저 없이 척척 주제가 가사를 써 주었다. 이런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사치에는 미도리에게 자기 집에서 함께 거주하기를 청한다.      


  자신감도 없고 매사에 소극적이기만 했던 미도리가 불현듯 여행을 꿈꾸며 세계 지도를 펴고 눈을 감고 무작위로 짚은 곳이 핀란드였다. 무작정 용기를 내어 먼 타지에 도착했지만 겁먹은  이방인이 될 뻔한 미도리에게 자신감을 준 것은 사치에의 따뜻한 배려였다. 그녀의 안락한 집과 그녀가 차려준 소박한 일본 밥상을 받고 미도리는 울컥한다. 미도리는 사치에의 도움만을 받기는 미안한 마음에 식당일을 돕고 사람들을 만나며 차츰 자신만의 장점을 살려 나간다. 그림을 잘 그려서 메뉴판에 따뜻한 생기를 불어넣는가 하면 사치에가 음식 만드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식당을 깨끗이 청소하기도 한다. 사람의 자존감은 큰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속도에 맞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기꺼이 할 때 충전된다.      


  세 번째 여성은 마사코(모타이 마사코)이다. 그녀는 처음에는 화가 난 듯 굳은 얼굴로 카모메 식당 유리 밖에서 식당 안을 주시해서 궁금증을 준 인물이다. 며칠 만에 결국 식당에 들어와 커피를 시킨 후 그녀는 비행기에 실은 짐이 행방불명이 되어서 난감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짐은 며칠 만에 돌아오고 짐가방을 여니 며칠 전 핀란드 숲 나무 밑에서 땄지만 없어졌던 버섯이 금빛 찬란한 빛을 띄우며 잔뜩 가방을 채우고 있지 않은가. 

     

  마사코는 중년이 된 지금까지 아픈 부모를 간병하다가 모두 돌아가시자 마치 족쇄를 벗어난 듯한 자유로움으로 핀란드를 향했다. 그러나 뒤늦게나마 자신만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있었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에어 기타 대회(실제 기타 없이 기타 치기를 흉내 내기), 사우나 오래 참기 대회, 부인을 업고 달리기 대회같이 시시한 것에 열을 올리는 핀란드 사람들을 여유 있는 모습을 보고 핀란드행을 결심한 마사코지만 갑자기 얻은 자유와 낯선 공간에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신의 길을 찾아갈지 혼란스럽기만 하다. 사치에와 미도리는 그런 그녀의 상황을 들어주고 도닥인다. 힘을 내라는 듯이 사치에가 만들어준 오니기리를 먹으며 눈물을 흘리지만 이제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결국 사치에도 점점 손님이 늘어나는 식당의 일을 도우며 핀란드에 머물게 된다. 짐을 잃어버려서 오랫동안 갈아입지 못한 무채색의 옷을 화려한 꽃무늬의 ‘마리메꼬’(Marimekko, 핀란드 국민 디자인 브랜드) 옷으로 갈아입고 마사코가 식당에 나타났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사치에가 자신만의 가치관에 철저하다고는 하지만 ‘곧은 나무가 바람에 꺽인다’는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일 만큼 그녀는 유연하기도 하다. 미도리의 의견을 들어보니 고향의 음식 오니기리만으로 핀란드 사람을 식당에 부르게 하기에는 무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호기심은 있지만 늘 식당 앞을 지나치기만 했던 세 할머니가 드디어 손님으로 들어선 것은 사치에가 갓 구운 시나몬 롤 빵의 냄새에 이끌려서이다. 이제 카메모 식당의 메뉴는 오니기리만이 아니라 핀란드 사람도 좋아할 돈까츠 같은 튀김에 일본식 밥과 야채, 연어구이가 등장했다. 점차 식당은 입소문을 타고 번창하게 된다. 그래도 사치에는 오니기리에 대한 향수를 포기하지 않았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세 여성과 식당의 첫 손님이자 만년 공짜 커피 손님이 된 토미 그리고 남편으로 받았던 상처를 세 여성에게 위로받았던 핀란드 여성 리이사(타르자 마르쿠스)가 모여앉아 오니기리를 함께 나누어 먹는 장면으로 마친다.     

 

  현실성보다는 담백한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카메모 식당>이 우리에게 주는 감동은 각자가 힘든 상황에서도 상대방이 겪고 있는 곤경에 귀 기울여주는 마음들이다. 음식은 그런 사람들이 안고 있었던 상처나 낯섦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소중한 매개이다. 그래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식구’(食口)는 꼭 혈연이 아니더라도 주위의 친구 그리고 나와 마음을 나누는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참 따뜻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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