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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y 03. 2022

세상을 향해 이야기 해야 해.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리뷰

  연출과 각본까지 담당한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 동명의 단편과 ‘셰에라자드’를 엮어 각색하였다. 비록 원작을 영화의 뼈대로 세우지만 류스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주제를 엮어내어서 고통스런 인간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잔잔한 울림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의 시작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마지막 장면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매일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안 온다면 오늘 낡은 끈 때문에 실패한 목멤을 내일 실행하기로 하지만 만약 ‘고도’가 온다면 살게 된다는 말로 연극은 막을 내린다. 누구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고도’의 도착 지연은 결국 평생 바위 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시지프스처럼 그것이 비록 무위라 할지라도 반복이 삶의 실존적 고통임을 의미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도 판도라의 상자에 숨어있는 희망은 죽음 후에나 오는 하나님의 위로같은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건 고통을 디디고 희망을 향해가는 현재의 순간들이다. 여기서 경탄할 만한 류스케의 연출은 정교하고 아름답게 씨실과 날실을 엮어내듯이 서로 섬처럼 떨어져 있던 인간들을 하나의 연대로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섬세하고 예리하지만 누구보다도 따뜻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품고 있는 감독의 시선이 느리고 우아하게 스크린에 펼쳐진다.    


늦어버린 도착(끊겨버린 이야기)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려 40분간의 프롤로그를 거쳐서야 영화 시작을 알리는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는 특이한 구성을 가진다. 이 40분에서 중요한 사건은 주인공 가후쿠(니지시마 히데토시)의 늦은 도착 때문에 구하지 못한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의 예기치 않은 죽음이다.   


 가후쿠와 오토는 누가 봐도 행복한 부부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어린 딸을 잃은 아픔을 묵묵히 견디고 있었고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한다. 그 이후로, 배우였던 아내는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아기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대신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세상에 내어 보내지는 것이다. 잉태와 출산이 그러하듯 이야기도 남편과 아내가 함께 만들어낸다. 특이하게도 아내는 남편과 성관계 후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말하고 그 다음 날 깨어나면 잊어버린다. 같이 출근을 하는 사이 운전을 하는 가후쿠가 조수석에 앉은 아내에게 간밤에 들었던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오토는 드라마 시나리오를 쓴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의 블라디 보스톡에 가는 출장 계획이 바뀌게 되고 가후쿠는 의도치 않게 아내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장면을 보게 되지만 못 본 척, 아내에게 감정을 자제한 채 침묵한다. 어느 날 “할 얘기가 있으니 일찍 집에 올 수 있냐“는 아내의 말에 기후쿠는 아내가 사실을 털어놓으면 아내를 잃을 두려움에 일부러 늦게 집에 도착하였고 아내는 지주막하출혈로 죽어있었다. 자신이 늦지 않았다면 살릴 수 있었다는 죄책감과 아내가 왜 다른 남자와 외도를 했는지에 대한 풀 수 없는 문제에 대한 고통과 아내를 상실한 아픔이 가후쿠의 마음에 돌처럼 얹힌다. 이제 잃어버린 딸아이를 대신할 이야기의 잉태와 출산도 끝이 난 듯 하다.  

   

끊긴 이야기 다시 말하기

  영화는 어떻게 가후쿠가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찬찬히 쫓아간다.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타이틀 자체가 동적 움직임을 연상시키듯 가후쿠(그리고 또 다른 상처입은 우리들)의 여정은, 외면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자기 자신의 상처를 똑바로 대면하고 말해야만 하는 치유의 길이었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셰에라자드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천일동안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었듯 아내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이야기도 끊겨버린 가후쿠가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은 다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아내를 떠나 보내고 2년 후, 가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에 체호프의 희곡 <바냐 아저씨>의 연출가로 초정된다. 가후쿠는 오래된 자신의 빨간 터보차를 굳이 그곳까지 운전해서 오지만 그곳의 규칙상 연출가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차만 탈 수 있어 미사키(미우라 토코)라는 여성이 임시 운전사로 고용된다. 자신과 아내의 오붓한 공간에 이방인이 침입하는 것 같지만 마지못해 차키를 미사키에게 내어준다. 차의 뒷 자석에서 가후쿠는 자신의 루틴대로 예전 오토가 소냐역을 맡아 녹음한 테이프를 작동시켜 바냐 대사를 반복 연습한다.  


 비록 이미 죽은 오토이지만  상실감과 죄책감을 부정하는 듯 가후쿠는 끊임없이 아내의 목소리를 소환한다. 자신이 아끼는 것은 오래된 차 자체보다 아내와 함께했던 시간을 품고 있는 작은 공간일 것이다. 그렇게 둘만의 공간이었던 차에 이방인 미야키가 끼어든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자리에. 뒷자리에 앉은 가후쿠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과거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테이프를 틀어놓은 채로 죽은 아내와 소통한다. 미야키는 가끔 백미러를 통해 가후쿠의 표정을 본다. 기후쿠는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얼굴로 건조한 대사를 기계처럼 반복할 뿐이다.   

  

  가후쿠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던 미사키가 "그 사람(다카츠키)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은 테이프가 아니라 실제 다카츠키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이다. 가후쿠의 차를 어거지로 탄 다카츠키(오카다 마사키)는 오토와 자신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던 가후쿠에게 오토의 생전에 들었던 ‘칠성장어와 소녀’ 이야기의 마지막을 이야기를 전달한다. 드디어 내내 미완성있던 오토의 이야기가 완성되었고 가후쿠는 그제서야 자신의 주위를 망령처럼 떠돌던 오토로부터 풀려난다.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던 다카츠키가 차에서 내리자 가후쿠는 ”아무일 없었던 처럼 살았던 태도 가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이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과 타협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제 자유로워진 가후쿠는  뒷자리에서 아내가 앉았던 운전석 옆의 조수석으로 옮겨 앉는다. 고용인과 피고용인인 아니라 동등하게 감정을 교감하게 된 두 사람은 차의 루프탑 위로 담배를 잡은 두 손을 동시에 올린다. 가후쿠의 잃어버린 어린 딸이 자랐으면 되었을 나이 23살의 미야키는 부활한 딸처럼 현재형 존재로 돌아왔다. 죽은 딸과 아내에 대한 기억을 떠나 보내지 못했던 마음의 족쇄가 담배 연기가 공중으로 흩어지듯 자유롭게 풀리는 해방(치유)의 순간이다.      


 그렇지만 늘 어딘가 어둡고 침묵으로 일관했던 미야키도 가후쿠처럼 마음 안에 과거의 상처를 안고 있었다. 술집을 하면서 늦게 귀가하던 엄마가 일터로 오고 가는 편의를 위해 엄마에게 운전을 배웠지만 엄마는 차의 흔들림이 자신의 잠을 깨우기라도 하면 운전하는 미야키에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던 모진 엄마였다. 산밑에서 살고 있던 그녀들의 집이 산사태로 매몰되었던 날, 미야키는 다행히 빠져나왔지만 엄마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때 이후로 엄마를 구해내지 못한 죄책감과 엄마를 미워했던 자신의 마음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엄마로 인해 훌륭하게 운전하게 되었고 아버지같은 가후쿠를 만나게 되었으니 행과 불행이 동전의 양면인 인생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그리고  미야키의 고향인 추운 홋카이도에 도착했을 때 미야키는 자신이 제일 좋아했던 폐기물 처리장으로 가후쿠를 데리고 간다. 불행의 단초가 되었던 동토의 블라디 보스톡의 출장 지연이 홋카이도에서 ‘행’(幸)이라는 꽃으로 피어나는 전환점이다. 어디선가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더러운 폐기물이 된 잡동사니들이 분쇄되어 하얀 눈처럼 흩어지는 처리장의 풍경을 좋아했던 미야키는 그제서야 엄마가 죽었던 장소에 꽃다발을 놓고 애도의 시간을 잠시 갖는다. 쓸쓸해 보이는 가후쿠를 미야키가 껴안는다. 그들을 옭아매었던 과거의 폐기물들이 눈송이로 거듭나는 신비의 순간이다. 그리곤 가후쿠가 미야키에게 말한다. “살아 남은 자는 죽은자를 기억해. 어떤 형태든 그게 계속되지. 나나 너는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어. 살아가야 해. 괜찮아. 우린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그제서야 가후쿠는 숨겨둔 자신의 모습인 것 같아 계속 피해왔던 바냐를 이제 자신의 분신으로 받아들이고 무대에 설 수 있게 된다.     

 

세상으로 번져나가는 이야기의 생명력

  히로시마의 리허설에서 가후쿠는 매우 특이한 연출 방식을 고수한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여러 나라에서 온 배우들은 일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와 심지어 한국 수어로 대사를 전달한다. 게다가 감정을 뺀 무미건조한 대사를 수없이 반복하게 하는 대본 리딩과 리허설 방식은 배우들을 기계적인 로봇에 불과해 보이게도 한다. 그렇지만 대사 읽기의 무수한 반복 이후, 정작 무대에선 배우들은 이미 익숙한 대사로 인해 처음으로 느끼게 되는 감정 자체에 몰입할 수 있게 된다.   

  

  리허설 중, 바냐 아저씨에서 소냐 역을 맡은 이유나(박유림)는 들을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로 인해 수어와 표정만으로 연기한다. ”힘들지 않느냐“는 가후쿠의 질문에 이유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수어는 비록 낯선 언어이지만 관객과 진심으로 교감하고 작품의 향기를 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의 틈 사이를 주시하는 집중의 순간들에 있을 것이다. 이때 서로가 몰랐던 너와 나의 마음의 우물을 들여다보게 되는 기적이 배우과 관객 사이에 일어난다.      


  그런 과정을 가후쿠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 걸어 왔던 것이다. 차 안에서  기계적 대사를 반복됐던 지루한 시간은 바냐가 느꼈던 좌절과 고통이 가후쿠의 몸에 스미기를 기다리는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꼭꼭 눌러두고 묻어왔던 아내와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자신의 온 마음을 실어 세상에 내놓고 이야기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죽은 아내는 남편이 혼자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곁에서 도와 왔던 것이다. 마침내 가후쿠가 스스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자 아내는 가후쿠를 떠나 죽음의 공간으로 휘발한다. 

      

  자신을 닮은 것 같아 회피했던 바냐의 역할을 맡은 가후쿠가 드디어 무대에 선다. 마지막 장면, 절망한 듯이 보이는 바냐 뒤에서 이유나가 소냐를 연기한다. 그때 말과 감정이 서로 만나 “무언가 일어나는 기적”이 일어난다. 소냐는 바냐역의 가후쿠를 등 뒤에서 안고 수어로 가후쿠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한다. "어차피 삶은 고통의 지속이지만 그 삶이 끝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수고를 위로하실 거"라는 소냐의 간절한 손짓과 표정은 고된 삶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당위성에 힘을 실는다.    

 

  잠시, 카메라가 관객의 자리에 앉아있는 미야키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다. 가슴 따뜻한 위로가 미야키에게 전해진 듯 그녀의 표정은 전에 없이 편안하게 무대에 집중하고 있다. 그리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가후쿠가 물려준 빨간 차와 이유나가 데리고 있던 골든 리트리버를 옆에 태우고 밝은 얼굴로 미야키가 부산 거리를 달려간다. 희망은 과거의 죄책감을 잊는 것이 아니라 그런 슬픈 삶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열고 위로를 나누는 소통의 순간에 숨어 있다. 그래서  ‘고도’는 미래형이 아니라 삶의 매 순간일지도 모르겠고, ‘우리가 삶을 다 끝내고 돌아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칭찬'은 견뎌낸 그 순간들을 이야기할 때, 살아내느라 수고했노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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