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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chid May 29. 2022

사랑이 끝났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죠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리뷰



갑자기 들이닥친 이혼     

“언젠가 저 구름 위에서/내 운명과 맞닥뜨릴 것임을 나는 안다/...고독한 유희의 충동/그것만이 구름 위 광란 속으로 나를 내몰았던 것인지/...이 삶 죽음의 추에 견주어/다가올 순간이나 저 스쳐 지나간 나날들이 다 부질없음을”     


  영화는 예이츠의 <한 아일랜드 비행사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다>라는 시구절의 낭독으로 시작한다. 노년의 그레이스(어네트 버닝)에게 한 방 펀치처럼 ‘훅’ 하고 들이닥친 이혼. 사랑의 파국도 죽음의 순간 돌아본 삶처럼 한낱 부질없는 것이니 힘들어도 삶을 이어가라며 영화는 남겨진 그녀의 어깨를 다독인다.  

    

  이름하여 ‘황혼 이혼’. 이제 서로 결혼으로 묶였던 끈을 풀고 자유를 찾아 남은 여생을 보낼 수도 있을까? 헤어질만큼 내가 너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헤어진다고 너와 지낸 시간이 지워질까? 돌아서고도 못내 남는 질문들에 영화는 대답한다. 떠나 보낸 ’너‘의 흔적이 담긴 당신은 생각한 것 만큼 혼자가 아니라고. 그래서 마음을 헤집어 놓은 상처는 그대로 안고 걸어가라고 말한다.      


  깍아지른 듯한 거대한 하얀 절벽과 잔잔한 물결이 이는 바다가 만나는 영국 남부의 ‘호프 갭’(Hope Gap) 해변을 예이츠의 시를 읊조리며 홀로 산책하는 그레이스. 시선집을 만드는 그녀는 이름만큼 우아해 보이지만 그녀의 태도는 시종 일방적이다. 얼핏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우아함은 집에 도착하자 남편 에드워드(빌 나이)의 등장으로 깨진다. 그레이스와는 반대로 내성적이고 감정의 표현을 아끼는 에드워드. 영화의 시작부터 서로 어긋나는 부부의 대화는 시종 살얼음판을 걷듯 불안하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돌아와 차를 끓이는 남편에게 왜 자기에게는 차를 마실 것이냐고 묻지 않느냐며 그레이스가 날이 선 듯 예민하게 말을 던진다. 이미 그녀 앞에 식은 한잔의 차가 있었으니 남편이 묻지 않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 저항 없이 아내에게 차를 마실 거냐고 묻고는 차를 끓인다. 이후 부부의 대화는 명령하는 아내와 자의식이 없는 로봇처럼 순응하는 남편 사이에 미끄러지는 어긋남의 반복이다.     


 심지어 아들 제이미(조쉬 어코너)조차도 엄마의 강한 기세에 눌려 집에 들르는 것을 꺼린다. 독실한 신자인 그레이스에게 사랑은 변하지 않는 약속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신과 자신의 관계라면 각자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들이 축적된 두 주체들의 결합인 결혼은 다른 문제이다. 그 ‘서로 다름’이 ‘희망의 틈’이 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에 있을 것이지만 그레이스와 데이비드의 29년 세월 동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그 다른 ‘틈’은 차갑게 얼어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것의 시작이 결혼의 전제 조건이라면 에드워드와 그레이스의 다름은 그리 문제가 될 조건이 아니었다. 문제는 두 사람이 서로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향해 마음을 열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석상처럼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 에드워드의 대답은 늘 영혼 없는 건성 대답이었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속내를 읽어 내지 못하는 에드워드의 아둔함에 화가 난다.     


  결국 줄타기같이 아슬아슬했던 결혼은 일순간에 파탄 난다. 그레이스의 기세에 힘들었던 에드워드는 ‘안젤라’라는 여성과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 집을 떠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레이스는 절대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믿음에 상처를 낸 남편의 뺨을 때리고 식탁을 엎는 난장을 쳐보아도 남편은 무덤덤하게 지켜볼 뿐이다. 화를 내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것은 반응이 없는 상대방의 무관심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꿈꾸었던 그레이스만의 낭만적 상상력은 일시에 무너지고 버림받은 여성의 시련이 시작된다.     


호프 갭(Hope Gap)을 걷다   

  자기의 새로운 사랑을 찾아 그저 단촐하게 가방 하나만을 들고 집을 떠나며 에드먼드는 아내를 곁에서 도와줄 아들을 부른다. 그러나 내성적인 아버지를 닮은 아들도 사사건건 자신을 간섭하려고 드는 엄마가 역시 버겁다. 이런 그레이스에게 에드먼드는 그건 아들의 사생활이라고 일침을 놓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어른으로서 아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사사건건 아들의 삶에 끼어드는 그레이스의 태도도 짜증 나지만 그렇다고 에드워드의 불간섭주의도 좋은 가족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부부이든 자식이든 가족이란 것도 다가가기와 멀어지기의 완급 조절이 쉽지 않은 사회적 공동체이다. 자기 자신들의 문제만으로도 버거워 어떻게 하면 힘든 아들을 도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없는 아버지와 엄마, 그럼에도 아들 제이미는 난관에 처한 부모의 틈 사이에 선다. 부모보다 의젓한 아들이다.  

   

 아무리 제이미가 설득을 해도 그레이스는 쿨하게 남편을 놓아줄 수 없다. 남편에 대한 사랑보다 자신이 믿어온 사랑의 신념을 배신당한 것이 못 견딜 만큼 자존심 상하고 비참해서일까? 아니면 자신이 믿는 사랑이 아직도 옳다고 신앙처럼 철석같이 믿어서일까? 그레이스는 남편에게 전에 없었던 애걸과 설득도 해 보지만 마음이 떠난 남편은 단호하다. 마침내 그레이스가 남편을 놓은 장면은 안젤라에 의해서이다. 그레이스가 허락없이 막무가내로 남편이 거주하고 있는 안젤라의 집에 들어와 에드먼드에게 비아냥거릴 때, 부엌에서 안젤라가 나온다. 안젤라는 침착하게 그레이스에게 말한다. “불행했던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두 사람은 행복하고 불행한 한 사람이 남았을 뿐”이라고... 현실을 깨달은 그레이스가 그 집을 조용히 떠난다.    

  



  이제 혼자 살아가야 할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지만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한 그레이스가 쓸쓸하게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을 때 아들이 엄마에게 말한다. 어머니가 걸어가는 그 힘든 여정이 그 뒤를 따라가는 자신에게 귀감이 되어주길 바란다고. 그런 엄마를 바라보며 아들은 중심잡지 못하고 흔들리기만 했던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고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이혼이 세상의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 곁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니 삶과 죽음의 경중이 별거 아니었다는 예이츠의 시처럼 사랑이 끝났다고 삶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훌륭한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이제서라도 인생의 선배로서 아들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일어서야 할 당위성을 아들로부터 얻는다. 그레이스는 미뤄왔던 시선집의 편집을 다시 시작한다. 혼자서 하던 아날로그식이 아니라 아들의 도움으로 컴퓨터 시스템을 이용하니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 독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또한 자신의 생생한 경험과 고통을 밑거름으로 자살을 꿈꾸는 다른 여성이 일어설 힘을 주는 자원봉사자가 된다. 명령하는 사람으로부터 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나만 아프다고 울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들어주는 사람이 된 그레이스는 떠난 반쪽의 공간에 세상 사람을 들인다.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간 그레이스에게 이혼의 고통은 성장통이었다. 어슐러 K. 르윈의 시처럼 사랑은 그냥 돌처럼 가만히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빵처럼 직접 만들고, 계속 손을 보면서 새롭게 바꿔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영화의 앞으로 돌아가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던 에드워드의 한 수업시간을 기억해본다. 전쟁의 패배가 목전에 다가왔을 때 후퇴를 지연시키는 약자를 버리고 퇴각하여 목숨을 건졌던 강자들이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합리적 선택과 윤리적 가치 배반 사이에서 강자는 정말 칼로 무를 베듯 과거를 잘라 내었을까? 형체도 무게도 없는 마음은 잊자고 하여, 도망치자고 하여 잘라 내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레이스를 버리고 떠난 에드워드도, 뒤에 남겨진 그레이스와 제이미도 누가 강자냐 약자냐를 가늠할 것도 없이 모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다. 여기저기 틈이 갈라지면서도 무한 시간동안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던 하얀 절벽의 위엄은 상처를 안고서도 살아내 왔던 그대들의 모습을 닮은 희망의 거석(巨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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