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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ner courage Sep 01. 2023

어미잃은 자식을 위로하며

우리 아버지는 태어나자마자 엄마를 잃었다. 할머니는 이른 아침 쌍둥이를 출산 후 하루 종일 피를 흘리다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3살 난 딸아이와 핏덩이 아들, 딸은 세상에 남겨졌다. 아이들은 외가와 친가로 나눠져 맡겨졌고 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시자 다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성인이 되자 생모에 대해 알려주셨지만 아버지는 4-5살 무렵부터 알고 있었다고 했다. 본가에 들러 잠들었다가 깨어보면 할머니(아버지의 할머니)가 아버지를 꼭 안고 울고 계셨다고 했다. "애미도 없는 불쌍한 것" 하면서..


아버지에겐 두살 터울의 남동생과 그아래 여동생까지 동생이 둘 더 생겼다. 섬세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노래를 좋아하는 아이는 장손이라는 무게를 어려서부터 져야 했지만 따뜻한 손길은 받지 못했다. 명절 선물로 들어온 고급 과자는 동생만 먹을 수 있었고 배우고 싶던 피아노도 동생만 배울 수 있었다. 항상 야단 맞고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어 친척들은 애미도 없는데 모자라기까지 하다며 애처로와 했다. 시간이 흐르자 아버지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투구를 쓰고 갑옷을 입기로 했다. 강하고 센 사람이 되기로 했고 섬세한 영혼은 꽁꽁 싸매어 숨겨버렸다.


어느날 한 스승이 아이의 영특함을 알아 채고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똑똑한 아이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구나"


아이는 자라났고 학교에서 손꼽히는 수재가 되었다. 사고 싶은 책이 있어도 살 수 없었지만 공부에 뜻이 없는 동생은 과외를 받았다. 공부해야 할 시간이라도 땡땡이 치고 사라진 동생을 찾아야 했다. 아이는 대학입학만을 기다렸다. 반드시 서울로 가서 이 집을 떠나야지.

입학원서를 쓰러 담임을 찾았을 때 아이는 또다시 무너졌다. 책상 위에는 지방국립대 의대 원서가 쓰여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이미 담임에게 통보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집을 떠나지 못하고 의사가 되었다.


그시절에는 수련 중인 의사의 월급은 너무 적어서 생활 유지도 어려웠지만 집안의 각종 잔치, 행사, 심지어 가족 사진 비용까지 전부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으며 빚보증으로 넘어간 삼촌 집도 찾아 줘야 했다.


부유한 집 딸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엄마는 시집 와서 처음으로 연탄을 갈아 봤다. 할머니는 며느리를 심하게 대했는데 특히 엄마에게는 말도 못하게 모질었다.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 모두 엄마한테 풀었다. 아버지는 너무 바빴고 엄마가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 몰랐다. 아버지가 할머니께 한소리하게 되면 다음날 엄마는 하루 종일 꿇어앉아 빌어야 했기 때문에 엄마도 아버지가 알길 원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하혈을 심하게 했다. 병원에 가느라 할머니께 가지 못했다. 할머니는 별일 아닌 걸로 병원에 갔다며 화를 내셨고 엄마는 몇시간을 꿇어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날 일은 나도 기억이 난다. 머리를 숙이고 꿇어 앉아 있는 엄마에게 소리치는 할머니 모습. 어린 아이가 보아도 뭔가 심상치 않았나 보다.


그날 엄마는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했고 지혈이 되지 않아 밤새 출혈이 계속 되었다. 결국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조직검사 결과는 암이었다.


한참 후 아버지는 그날 할머니가 엄마에게 한 일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크게 소리지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가 있냐고. 암에 걸려서 피를 흘리는 사람을 어떻게 꿇어 앉혀 놓냐고...

암수술을 받게 된 엄마의 간호는 외할머니가 하기로 했지만 나와 동생을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가 소리친 일로 할머니는 우리를 봐 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그해 여름 부산에 있는 고모댁에 맡겨졌다.


이후 우리 집안은 그렇저렇 평안하게 지내 왔다. 크고 작은 문제는 있었지만 깨어지지 않고 유지 되었다. 아마도 할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인 듯 하다. 할아버지는 정정하셨는데 90세가 지나자 서서히 쇠약해졌다. 돌아가시기 전 5년동안은 거동이 어려웠고, 배뇨도 어려워 관을 삽입했고 뇌경색도 왔으며 알츠하이머도 점차 진행되었다. 그 5년동안 아버지와 엄마는 정말 최선을 다했다. 돈과 정성 모두.


할아버지 상태가 안좋아지자 할머니는 아버지 탓이라 했다. 돌아가시고 나자 할머니는 아버지가 할아버지 돈을 가져갔다고 했다. 모두가 아니라고 얘기해도 모든 걸 아버지 탓을 했다. 아버지는 할머니와 연결된 끈을 더이상 잡고 있기가 어려웠다.


지난주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95세 이시니 장수하셨고 호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1년전 집에서 넘어졌는데 좌측 대퇴골이 부러졌다. 모두 어렵다고 했지만 수술을 받고 회복했다. 하지만 겨우 거동이 가능해질 무렵 낙상하여 반대측 대퇴골이 탈골 되었다. 뇌경색도 오고 치매도 심해졌다. 약해진 몸은 요양병원을 휩쓴 코로나 태풍을 견디지 못했다.

지난 1년간 할머니 곁에는 삼촌이 있었다. 점차 쇠약해지고 변해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장례식 내내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하고 울고 있는 삼촌을 보자

할아버지 장례식때 눈이 부어 잘 뜨지도 못했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그때 고아가 되었고 삼촌은 지금 고아가 되었다.


날 때 부터 어미가 없는 아버지도 슬프지만

70이 넘어 어미를 잃은 삼촌도 똑같이 슬프다.


세상의 어미 잃은 자식은 모두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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