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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01. 2024

무소유(無所有)

#10


여행을 다녀온 다음날엔 노곤한 몸의 고요한 아우성에 정신을 잃듯 깊은 늦잠을 자게 됩니다. 


하지만 2박 3일로 급하게 잡은 사천 타니 CC와 순천 파인힐스 CC 골프여행을 다녀온 다음날 새벽. 잠이 깼습니다. 피곤하면 더 윙윙 돌아가는 마음의 여과기 때문입니다. 방에서 나와 소파에 잠깐 누웠습니다. 왼쪽 귓구멍이 간질거립니다. 손가락으로 귀를 후빌지를 고민하다 포기했습니다. 꼼짝하기가 싫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끝없이 반복되는 파도처럼 마음의 방파제로 밀려와 부딪치고 부서지며 포말이 되더군요. 코 끝에서 포말이 터지며 짙어진 바다향처럼 세타(theta) 파가 파다합니다. 


여행 첫날 송광사를 둘러본 후 법정(法頂) 스님이 17년간 기거했던 불일암으로 오르는 무소유길에 들어섰습니다. 

포장된 길도 있었지만 흙길을 선택했습니다. 나지막한 산이지만 허리를 살짝 돌 때까지는 꽤 가팔랐습니다. 오름세가 무뎌지며 적송의 체취가 그득해졌고 편백나무가 바통을 이어받는가 싶더니 빼곡한 대나무가 만든 터널 입구가 나오더군요. 400미터 정도 되는 길지 않은 오솔길은 정말 변화무쌍했습니다.


해우소인가 싶었던 두터운 이끼가 덮인 너와 지붕 목간(沐間) 건물, 텃밭을 지나 작은 마당 위로 올라 암자 앞에 섰습니다. 법정 스님 사진이 걸린 외벽 모퉁이에 묵언이라는 글씨가 쓰인 팻말, 그 아래 직접 만들어 사용하셨다는 거칠고 투박한 의자,... 소박한 종교시설이 주는 편안함에 마음도 덩달아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의자 옆에 놓인 동그란 의자에 돈이 보였습니다. 아마 좋은 일에 쓰이길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이리라 생각했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돈 바구니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스님의 무소유를 읽은 사람들의 실천이라고 마음을 몰고 갔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https://youtu.be/F4Ny6Ql26xY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모든 걸 정리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제일 쓸데 없어진 게 골프 관련 트로피였습니다. 그중에 좋은 것들을 친구에게 주었습니다. 금속 플레이트를 떼어내 거나 그 위에 새로운 플레이트를 덧붙이면 동호회 운영에 도움이 될까 싶어서였습니다. 그중에는 작은 냉면 그릇만 한 순은 트로피가 있었습니다. 당시 은 값으로 90만 원을 지불한 우승컵이었습니다. 은 값을 받고 팔면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동호회가 잘 되길 바랐습니다. 제가 만들었던 동호회에 참가가 불가능한 건 물론 골프 자체를 칠 수 없는 상황이 확실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골프를 다시 치고 난 후, 그 트로피만은 종종 생각이 났었습니다. 요즘 은 값으로 4백만 원짜리 트로피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다시는 가질 수 없는 트로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마 40만 원짜리 은도금 컵이었다면 전혀 달랐을 겁니다. 싱글트로피나 다른 트로피는 정말 하나도 아깝지고 않고 추억이 묻어있다는 생각에 아쉽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무소유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 은배는 내 골프가 가질 수 있는 최고 금액이 상금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모양은 트로피였지만 사실은 돈의 가치로 빛났던 트로피.


불일암 앞에 놓인 돈통을 보며 트로피가 생각났습니다. 아니 그 트로피를 생각하는 저를 봅니다. 무소유는 어쩌면 돈이 없었다면 그렇게까지 큰 화두나 깨달음이 되지 못했을 단어나 책, 혹은 개념일지 모릅니다. 돈은 욕심이 입양해 잘 키운 자식이란 생각도 듭니다.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선 어떤 실천도 결국 무소유로 다가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욕심은 자식이 참 많습니다. 골프도 그중 하나입니다. 무소유로 향한 길이 골프에도 존재할까요? 무소유는 결국 자유를 위한 실천인데 자유로워진 골프는 어떤 모습일까요?  

 

다시 골프를 칠 수 있다는 희망이 싹트고 처음 용기를 내서 골프장으로 향했고 공은 거의 맞추지 못했지만 그래도 2홀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감동보다는 용기를 느낀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8홀을 마칠 수 있는 상태가 되며 제 골프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대폭 준 실력도 한몫을 했겠지만 골프 라운드 타수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습니다. 오늘의 스코어는 그저 오늘까지만 이지 결코 내일의 내 골프를 설명하거나 알려줄 수 없다는 방향의 생각이 자리 잡았습니다. 스코어에 집중했을 때 못 보던 것들이 점점 더 많이 보이며 골프로 가져가는 것들이 훨씬 더 풍족하고 단순하며 원초적이 되더군요. 그리고 만족과 행복이 훨씬 더 쉬워졌습니다.


어느 날 골프 백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드 2개를 빼고 60도 웨지도 빼고 롱 아이언도 뺐습니다. 클럽이 적어지니 마음에도 여백이 찾아오더군요. 실수에 훨씬 더 관대해졌고 조금만 잘 쳐도 기쁨으로 뿌듯해졌습니다. 


가끔은 4개나 5개만 가지고 골프장으로 향합니다. 그럼 또 다른 기대가 됩니다. 몇 타를 칠까도 궁금하지만 2홀만 치고 와야 했지만 54홀을 친 것 같았던 그날 골프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란 생각 때문입니다. 


이젠 건강도 시간도 돈도 부족했던 그때라서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게 잘 갖추어지고 풍족해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골프를 향해 가고 싶습니다. 결국 같은 말이지만 나이도 그렇고 남아 있는 시간도 너무 짧은데 얼마나 빨리 지나가 버릴지 알게 되었으니까요.


이젠 그 은배도 떠나보내려고 합니다. 소박한 암자 같은 골프를 치고 싶다면 저도 여기저기 놓은 돈통부터 치워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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