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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03. 2024

"악법도 법 이래~"

골프가 좋은 이유 101가지 

열두 번째 이야기

"악법도 법 이래~"


키도 큰데 승모근도 좋은 A. 

내가 10cm만 더 컸으면 다 죽었을 거라는 B. 

참 운동 못하게 생겼는데 골프는 잘하는 C. 

음주골프와 개똥철학의 달인 D. 


D를 빼고는 구력도 거의 비슷, 핸디는 막상막하. 한마디로 쫄깃한 내기 골프를 칠 수 있는 환상의 썸입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묻지 마세요. 길기도 길지만 다치십니다. 농담입니다. 이렇게 모인 지 어느새 2년째가 되었습니다. 


매달 두 번째 주 수요일을 위해 나머지 골프를 칩니다. 진검승부 거든요. 돈도 돈이지만 나름 서로의 골프 실력을 인정해서인지 승리의 쾌감은 정말 찌릿찌릿합니다. 오늘도 율곡 이이의 어머니나 신사임당이라는 호로는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녀의 이름은 아무도 모르는 분의 얼굴이 그려진 빳빳한 종이 18장을 준비했습니다. 배판이나 기타 등등 하나도 없는 스킨스 게임만 합니다. 

홀당 종이가 4장인 거죠. 공 조금 친다고 룰대로 하되 로컬룰은 적용을 하기로 했고 벙커 발자국 안에 들어간 경우에 한해 고무래로 고른 후 발목 높이에서 드롭하는 자체 로컬룰 하나만 게임의 룰에 추가했습니다. 벙커 발자국 자체 로컬룰 가지고 갑론을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PGA처럼 관리가 안 되는 벙커인데 PGA룰을 적용하는 건 옳지도 않고 어차피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이라는 D의 판단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4번째 홀에서 D가 쌓여 있는 스킨 16개를 해치우더니 좋아하는 소주 첫 잔을 목 넘긴 표정을 짓습니다.

버디가 나와도 승부가 나지 않는 홀 덕분에 스킨이 또 16장짜리가 되었습니다. 


전반 마지막 홀은 A가 제일 좋아하는 파 5였습니다. 힘이 좋아 제대로 맞으면 250미터도 날리는 장타자였으니까요. 스킨은 못 먹었지만 아너인 A가 승모근을 풀고 어드레스에 들어가더니 샷을 날립니다. '워메~!' C가 워낭소리 영화에서 들었던 것 같은 소리를 냅니다. 페어웨이 한가운데를 가르는 공을 쫒다 보면 동반자들 심장이 살짝 빨라지는 그런 샷. 오잘공이었습니다.

D가 머릿속 생각을 지우려 애씁니다.

"투온이 분명하군. 나도 힘을 좀 써? 아니야. 아니지. 이 글은 뭐 맨날 나오나... 차분하게... 자자..."

D의 공은 살짝 밀렸지만 다행히 오른쪽 러프에서 멈춥니다.

C는 한참 뒤쪽 페어웨이. 

체격에 비해 장타자인 B가 젖 먹은 힘까지 짜내더니 왼쪽 러프방향. 거의 230을 때렸습니다.


C의 세컨드샷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B가 C와 A를 부릅니다. B의 공은 러프였지만 수리지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수리지에서 홀컵에 가깝지 않은 방향으로 가장 단거리 구제 지점으로 드롭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좌도그렉 홀이다 보니 구제된 곳은 짧게 깎인 A러프였습니다. 행운이었습니다.


그런데 A의 얼굴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룰미팅을 요구합니다. 거리로는 투온이 충분한 곳이었고 앞팀은 아직도 어프로치를 하고 있어 시간은 충분했습니다.


A의 공은 깊게 파인 디봇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홀방향 쪽 끝부분에요. 얼마나 힘이 좋은 사람이 만든 디봇인지 쏙 들어가 있는 공이 거의 다 잠긴 상태였습니다. 모래도 없고 진한 흙 색깔을 봐도 그렇고 방금 전 생긴 디봇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A가 말했습니다.

"이건 너무 한 거 아닌가? 살짝 난 디봇이면 말을 안 하는데 이건 정말...."

맞는 말이었습니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게..."

"야 이건... 대체 어떤 사람이..."

이구동성이었습니다.

A가 말했습니다.

"근데 이 정도로 땅을 팠으면 앞에서 플레이했던 플레이어나 캐디가 모래로 채웠어야 했는데 안 한 거니까 벙커 발자국처럼 우리 로컬룰을 적용해야 하는 건 아닌가?"

아무도 즉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앞팀이 그린에서 퍼팅을 시작했습니다. 


고민하던 B가 말했습니다.

"그런 이번 홀은 그냥 치자. 스킨스는 다음홀로 이월시키고 말이야. 그리고 이건 너무 하니까 무벌타 리플레이스를 하고 말이야. 어때?"

C가 말했습니다.

"오오... 그거 참 좋은 생각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하지만 A가 반대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룰에 문제가 있는 건데... 내기를 왜 안 해! 이건 룰이 잘못된 거잖아."

C가 말했습니다.

"그건 또 그래. 이건 룰 적용이 너무한 것 같아. B는 잘 못 쳐서 러프로 들어간 거잖아. 하지만 거기가 왜 수리지가 된 건지 별다른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결론적으로는 룰 덕분에 짧은 잔디로 드롭을 할 수 있었고. 오히 정말 잘 친 A의 공은 저런 곳에 처박혀 잘 친 거에 대한 보상은커녕 벌타 드롭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말이야." 

하지만 A와 B는 생각이 다른 게 분명해 보입니다. 앞팀이 그린을 빠져나갑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가만히 아무 말도 없던 D의 가슴에서 끄응 힘주는 소리가 나는 것 같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악법도 법 이래!"


여러분은 어떤 사람의 말이 더 맞는 것 같으신가요? 이 홀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나고 그 결정을 떠나 4명의 골퍼는 각자 어떤 생각, 어떤 느낌으로 남은 홀들을 보냈을까요?


https://youtu.be/sZuHD5_sWdE


참고로 출연진은 다음과 같습니다.

A는 아마튜어 열혈골퍼입니다. 저도 될 수 있고 여러분도 될 수 있는 그런 골퍼죠. 

B는 솔로몬입니다. 엄마라면 아이의 죽음을 싫어할 것이라며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눠주라는 본질을 꿰뚫는 판결이 유명하지요. 요즘 같았으면 아무리 의도가 좋았어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 만으로 패륜남의 대표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C는 황희 정승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두 노비가 서로 다투자 너도 옳고 너도 옳다고 했고 그걸 본 부인이 줏대가 없다고 하자 부인도 옳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사실인지 꾸며진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진실과 팩트조차 상대적 관점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는 심오한 철학이 담겨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선택과 결정의 시점에서는 어떤 도움이 될지... 금세 답이 떠오르지는 않네요.


D는 소크라테스입니다. 뭐 너무 유명해서 설명이 필요 없지만 가장 민주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처해진 인류 최초의 양심수인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하며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했을까요? 아니면 악법에 방점을 찍기 위해 한 말이었을까요? 

'법을 따르지만 이건 악법이다.' 

'악한 법도 따라야 한다.' 

같은 말 같지만 다른 두 개의 의미 중 여러분은 어느 쪽으로 마음이 더 쏠리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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