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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Feb 25. 2024

장비병 1기랍니다

#33

#33 장비병 1기랍니다

친구 녀석의 카톡이 왔습니다. 한숨을 쉬며 3기라고 하네요. 그래도 말기는 아니라 다행이라며 쓰러져 배를 잡고 발을 구르며 깔깔거리는 이모티콘을 보냅니다. 너도 모르니 한번 테스트를 해 보라는 톡을 마지막으로 친구의 톡이 끊겼습니다.


치료가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진단을 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지만 결국 앱을 깔았습니다.

노란색 심장 모양 아래 '골병'이라는 앱 이름에 고인침이 꼴깍 넘어갑니다. 침과 함께 긴장감을 넘기고 시작했습니다.


101가지 질문에 순차적으로 답을 하면 진단 결과가 나오고 중간에 멈춰도 나중에 이어서 진단 프로그램을 끝낼 수 있다는 안내가 뜹니다. 핸드폰 인증을 하고 이름과 나이, 젠더(gender) 구력, 핸디, 최저타수를 입력하자, '두둥' 북소리가 나며 진단의 시작을 알립니다.


첫 번째 질문이 떴습니다.

- 특정한 공만 사용하시는지요? 그렇다면 사용하고 계신 골프공 브랜드와 라인, 공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입력을 마치고 나면 NEXT 버튼을 눌러주시고 아니라면 NO 버튼을 눌러 주십시오.


참 쓸게 많더군요. 왜 이 브랜드를 사용하게 되었는지. 4피스 볼도 나오지만 왜 3피스를 사용하는지. 심지어 같은 흰색이지만 살짝 밀키 한 느낌이 나는 흰색을 선호한다는 것까지 적었습니다. 첫 질문을 마치고 나니 첫 홀로 향하는 카트 안에서 반짝이는 슬리브 박스를 열어 세 쌍둥이 중 첫째가 손바닥으로 떨어져 안겨 올 때 느끼는 감동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마커(Marker)를 들고 녀석들 보조개 네 개를 묶어 클로버(Clover)로 그려주는 출생신고의 리츄얼. 멀리서 '빠아앙'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에어혼(Air horn) 소리가 들릴 때처럼 살짝 어지러운 두근거림의 순간입니다. 

아... 진짜. 반짝이는 새 공... 너무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간단하네요.

- 골프공에 있는 딤플의 역할과 숫자의 색깔이 가진 의미를 적어 주세요.

플랑크톤 수프(Planktone soup:플랑크톤이 너무 많아 수프 같다는 표현)를 만난 물고기처럼 지체 없이 슉슉삭삭 답을 적습니다.

일단 딤플은 공이 멀리 가기 위한 필수 요소인 양력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공의 회전이 중요하고... 어찌어찌 이래저래... 석사급 논문을 쓰고 나니 진단 프로그램이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내가 알고 있는 걸 정리하고 그러면서 나라는 골퍼가 어떤 골퍼인지를 알려줄 것 같다는 신뢰도 들었습니다. 

골프공 숫자의 색깔에 대한 답을 적었습니다.

최근에는 여성용 형광색 공에도 검은색 숫자가 사용되는 등 예전처럼 절대적이진 않지만 골프공에 있는 숫자는 골프공의 경도를 표시하는 도구였고 스윙스피드가 일정 수준 이상 빠른 사람은 컴프레션(Compression) 100인 검은색 숫자를, 일반 아마튜어 남자는 90인 빨간색 숫자, 일반 여자 골퍼는 녹색이나 파란색... 


겨우 문제를 두 개 풀었고 아직도 99개의 질문이 남았는데... 벌써 두렵습니다. 이제 겨우 99개만 답하면 끝이 난다는 게 싫어지네요.


 전기 포트 맨 아래 엉덩이에 달린 작은 꼬랑지를 꾹 눌렀습니다.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지난번 일본 골프장에서 아낀 돈으로 듬뿍 사온 내림 커피 한 봉지를 꺼내 주둥이가 작은 컵에 올리고 커피를 내립니다. 향기가 코를 타고 폐로 안 가고 죄다 비강에만 모였다 외이도로 빠져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제 세 번째 질문입니다. 

- 티샷 한 공이 카트길에 맞았습니다. 어떻게 다음 홀에도 사용을 하시나요? 사용하건 안사용하건 그 이유를 알려주세요.


나? 당연히 안 쓰지.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열혈골퍼 아닌가. 단순히 까져서 안 쓴다면 그건 내 골프의 진심에 대한 도전이지...ㅋㅋ


사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실험을 했다고 하더군요. 똑같은 공이지만 새 공과 헌 공(낡은 공, 물에 잠겼던 공, 까진 공, 등등)의 비거리를 스윙 로봇으로 쳐 보고 그 결과를 측정해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업체에서는 보다 정밀한 실험을 위해 새 공을 연못 진흙 속에 1개월/3개월/5개월 동안 담가 놓았다가 꺼내기도 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표면 흠의 정도가 아주 조금씩 차이가 나는 공들을 실험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접근을 했다고도 합니다. 정말 다양한 조건과 방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아주 오래된 골프공은 탄성 자체를 잃어버리기에 큰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즉, 약간의 까짐이나 상처는 바람이 많이 불거나 헤드스피드가 무척 빠른 골퍼가 아니라면 별 차이가 없다는 이야기죠. 사실 요즘 골프공이 차지하는 골프업계의 매출 비중 때문인지 이런 기사는 별로 언론을 타지 않습니다. 아니 못 타는 건가요? ㅎㅎ


저는 그걸 알지만, 멋진 골프웨어를 위해 몇십만 원을 쓰면서 헌 공을 쓰고 싶지는 않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하듯 골프를 위해 공을 삽니다. 꽃보다는 공인 사랑인걸 까요?  


그냥 까진 공은 안 쓴다고 하면 될 걸, 주책없이 이런 이야기까지 답에 쓰고 말았습니다.


다음 질문을 위해 NEXT 버튼을 눌렀는데 '골병' 앱 화면 한가운데 골프공이 나오더니 회전을 하네요. 그러더니 점점 빨리 회전을 하는데... 앱이 문제가 생겼나... 아니면 연결이 안 좋은가...


앗 공이 멈췄습니다. 그리고 주황색으로 화면이 번쩍 거리더니 굵은 폰트로 쓰인 흰 글씨가 깜박입니다.

'당신은 장비병 1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작은 글씨 설명이 보입니다.

'당신의 증상이 1기라는 결론은 아닙니다. 다만 더 이상의 질문이 필요 없이 당신은 장비병 1기에 충분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뿐입니다. 장비병은 당뇨처럼 한번 진단을 받으면 골프를 하는 한평생 함께 해야 합니다. 차분한 마음과 이성적인 판단이 힘을 잃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합병증으로는 부부 싸움, 비자금 저수지 바닥 탐사, 사랑하던 클럽과의 너무 잦은 이별로 인한 애잔병, 당근 온도 상승 등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

저 무서운 합병증들.... 


맨 아래... NEXT가 깜박이는데...

왠지 누르면 밤새울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커피를 한잔 더 내려야 할까요?


(아... 참고로 저는 지난 10년 넘게 공을 단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주운 공을 아무거나 씁니다. :)

https://youtu.be/vOej9Rb9G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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