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34 골프 군협지(群俠誌)
중학교 1학년 때쯤 읽었을 것 같은 와룡생의 역작 군협지 속 한 장면이 생생합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대련을 했는지 진짜 싸웠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어쨌거나 둘이 함께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워낙 무공이 뛰어나서인지 남자 위에 여자가 몸이 정확히 포개진 상태로... 키스까지 자동으로 된 채 누워있던 장면이 또렷이 기억납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그 장면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아마 100번은 읽었을 것 같고 그때마다 그 장면 속 남자주인공의 마음을 상상하며 가슴이 콩닥콩닥했던 추억을 떠올리니 지금도 살짝 또 가슴이 떨려옵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이 무협지에서는 쉽게 가능합니다. 그러고 보면 골프에서도 살짝 비현실적인 현실을 접하게 됩니다.
벌써 10년이나 되었네요. 명문(名門) 파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밀라노처럼 패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에비앙처럼 부유한 골퍼들이 모여들 던 명문(名門) 파는 무공에 방점을 둔 문파 라기보다는 권세 있는 집안을 부르는 세가(世家)가 더 어울리는 문파입니다. 전통적인 무공보다는 장비술(裝備)이나 둔갑술(遁甲)을 중요시해서, 무공을 겨루는 경연 대회에서도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앉는 주인공은 가장 포토제닉 한 둔갑술을 보인 골퍼가 되는 각별한 이데아(idea)를 가진 문파였습니다.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당대 인류의 모든 지식이 소장되어 있었다지요. 모든 문파는 무예와 무도, 수련 과정을 기록하고 보전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명문(名門) 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미국에 살고 있는 골퍼 Q의 편지가 명문(名門) 파에 도착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이 사는 방대한 지역의 골프장을 자세히 보여주고 설명하는 편지였습니다. 한 통 두 통, 차곡차곡 편지들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쌓여온 편지 뭉치가 두꺼워지며 문주의 마음도 감동했던 것 같습니다.
골프장을 통으로 빌려 정기 모임을 가졌던 명문(名門) 파 스케일 다웠습니다.
왕복 비즈니스 항공권과 일정 소화에 필요한 특급 호텔, 모든 라운드와 수차례의 만찬에 Q를 초청했습니다. 물론 모든 비용은 초청자인 명문(名門) 파에서 처리했고요.
Q의 이야기를 들으며 절벽에서 떨어진 덕분에 아리따운 여자와 입술이 포개졌던 군협지의 남자 주인공이 떠올랐었습니다. 같은 취미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모이는 문파에서 일어났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정말 중원 무림은 넓고 문파는 많다는 걸 또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중원 아마(兒馬)계의 고수들을 많이 접했습니다. 여러 문파의 다양한 무공을 접했습니다. 꽤 많았던 자칭 고수가 저처럼 소리도 요란 한 수레(車)라 그랬는지 오히려 기억에 남은 고수는 차분함이나 침착함이 돋보였던 골퍼들이었습니다.
스코어로는 도저히 표현되지 않는 무공의 깊이가 느껴지는, 아니, 절절 흐르던 골퍼로는 단연 한여직업(韓女職業) 문파에서 활동하며 여러 번 무공대회를 석권했던 K를 꼽을 수 있습니다. 대회 이틀 전, 대회가 열리는 코스에서 함께 연습 라운드를 돌았습니다. 연습라운드답게 60% 정도의 집중력으로 라운드를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샷은 당연하고 퍼팅까지 거의 비슷한 리듬과 힘으로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말투와 표정, 걸음걸이가 차분하더군요. 가벼운 대화도 있었지만 라운드를 마쳤는데 그렇게 고요한 그러나 전혀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은 라운드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라운드가 지금도 마음에 흩어지지 않는 안개처럼 자욱합니다. 안개가 끼었는데 안 보여 답답하지 않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좁아졌지만 그래서 숨소리가 들렸던 것 같은 경험. 그녀와의 라운드는 지금도 소중한 추억입니다.
188센티의 키. 우람한 등근육과 어울리는 이두삼두 박근들. 한남직업(韓男職業) 문파에서 살짝 열어두는 월요쪽문출입증(Monday Qualifier)을 받기 위해 애쓰던 P와 몇 번의 라운드를 했습니다. 짧지만 그린 앞으로 키 큰 나무들이 작은 그린을 막고 있는 살짝 우도그렉 블라인드 320야드 파 4. 드라이버로 웨지만큼 띠워 강력한 하이페이드를 쳐 나무를 넘겼습니다. 그린이 보이는 지점에서 보니 그린에 공이 하나 있더군요. P의 공이었습니다. 정말 어마어마한 컨트롤과 정확도의 파워 게임이었습니다. 하지만 P의 도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긴장감 때문이었는지 프레셔 때문이었는지 잘 모르지만 실수가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상상만 해 봅니다. 아마 무공이 높을수록 실수는 훨씬 더 치명적 일지 모른다는 생각, 무공 하나만으로는 중원에서 살아남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직접 동반 플레이를 했던 사람들 중에는 프로와 아마를 통틀어 뉴저지 뉴톤(Newton) 컨트리클럽의 클럽챔프이며 캡틴이었던 T의 무공이 가장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185센티 정도의 키. 그러고 보면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키가 큰 게 유리한 것 같습니다. US 아마튜어 오픈 128강 두 번 진출. 최저 타수 64타 14번 기록. 놀라운 기록입니다. US 아마추어 128강은 겨우 128강으로 느낄 수 있지만 정말 어마어마 한 기록이고 실력입니다. 어려서 할아버지가 멤버인 뉴톤 CC에서 골프를 배우고 캐디 알바를 했고 당연히 어느 순간 클럽 챔피언을 먹었고... 클럽 챔피언을 빼고는 멤버 부모나 조부모를 둔 전형적인 미국 골퍼의 길을 걸은 거죠.
날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운 공이 있습니다. T가 친공이 그랬습니다. 임팩소리와 공의 비행소리가 좋은 골퍼였습니다. 모든 샷이 좋았지만 퍼팅이 가장 놀라웠습니다. 거의 들어가거나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의 펏. 살짝살짝 펏이 빗나가다 어느 홀에선가 T가 말했습니다.
"K. US 오픈에 나가잖아. 그린이 정말 좋아. 그린 대로 그대로 구르지. 제대로 읽기만 하면 거의 다 들어간다고 보면 돼."
저 같은 공차(空車:빈 수레) 파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약간의 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T의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었습니다. T의 무공이 깊고 깊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맑은 개울 소리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어느새 골프의 시간이 무척 길어졌습니다. 자연히 기억과 추억들이 서 있는 곳이 더 까마득 해 졌습니다. 가까운 인연이 되지는 못했지만 기억 속에 생생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50이 넘어가니 시간은 훨씬 더 빨리 흐르고 있는데도 푸른 잔디가 올라 올 4월 중순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멀었네요. 삶은 이렇게 빨리 멀리 열심히 지나가며 여기저기 인연의 망부석을 세우는 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