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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Mar 01. 2024

장타자 3명과의 힘들었던 라운드

#36

초보를 막 벗어 날 때 였습니다. 세명의 장타자와 동반 라운드를 하며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저는 짤돌이였습니다. 

https://youtu.be/KwXJ4b0Z-hs


180cm로 셋 중에 제일 키가 작은 활명수는 척 봐도 날렵하고 단련된 몸을 가진 태권도 사범이었습니다. 다니던 건설사가 어려워졌을 때 마침 선수로 키우고 싶어 했던 예전 스승의 연락이 왔고 사범이 되었습니다. 남자로는 드물게 서서도 다리를 일자로 찢을 수 있었습니다. 절도와 유연성이 겸비된 간결한 스윙으로 한 거리 하는 골퍼 였습니다. 활명수의 드라이버 비거리 250미터.


일반 사람보다 몸통이 굵은 사람이 있는데 심은대가 그랬습니다. 앞에서 보나 옆에서 보나 몸통의 두께가 비슷하고 키도 184cm라 한마디로 거구, 전통적인 씨름선수 느낌이 났습니다. 드라이버를 휘두르면 장풍 소리가 났고 잘 맞으면 260미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188cm로 셋 중에 키가 제일 큰 수행자는 바싹 마른 장작 같은 몸인데 엄지손가락을 뒤로 꺾으면 손톱이 팔뚝에 닿았습니다. 악력이 세고 관절의 꺾임이 좋아서인지 키가 커서 아크도 커서인지 거리가 제일 많이 났고 드라이버 거리 270미터까지 가능했습니다.


첫 홀 세명의 체구와 드라이버 빈 스윙 소리를 들은 캐디가 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조금 안 됐다는 표정으로 저를 슬쩍 쳐다보는 것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앞팀이 세컨드샷을 끝내고도 뒤땅이 난 한 명의 서드샷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티샷을 시작했습니다. 이게 웬일인지 세명 모두 페어웨이. 캐디가 연속 감탄의 굿샷을 날렸습니다. 물론 짤순이인 저도 페어웨이 안착.

특히 활명수와 심은대, 수행자는 의외였습니다. 세명 모두 연습장에서는 짱짱한 소리와 비거리를 자랑하지만 필드에만 나오면 헤매는데 특히 활명수는 첫 홀 돼지 꼬랑지 샷이 장기인데... 신통방통한 첫 홀이었습니다. 


첫 홀 티샷을 보고 캐디가 블루티나 블랙티로 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캐디 말처럼 드라이버의 최대 거리로 보면 백티(back tee)로 가야 했습니다. 하지만 탑볼이나 슬라이스, 뽕샷으로 200미터도 안 나가는 샷이 더 많았고 해저드를 못 넘기는 홀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진행 때문에 백티 플레이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2번 홀 짧은 파 4. 앞팀이 그린 근처까지 가기를 기다렸습니다. 밀리지도 않았는데 기다림이 기본이 되는 느낌입니다. 아너 심은대의 임팩 소리가 좋습니다. 굿샷이라고 외치려는데 조금씩 오른쪽으로 밀리더니 OB가 납니다. 조금만 덜 맞았어도 안 죽을 수도 있는 공이었는데... 


OB를 확인한 심은대가 드라이버를 어깨에 올려놓고 목을 꺾어 돌립니다. 모두 티샷을 끝낸 후 심은대가 다시 티를 꼽습니다. 캐디가 오비티가 있다고 했지만 심은대가 자신은 골프룰대로 칠 거라는 답을 합니다. 워낙 확고하게 이야기해서인지 캐디가 움찔하는 것 같았습니다. 심은대의 두 번째 티샷과 앞팀 마지막 선수의 퍼팅이 거의 동시에 끝났습니다. 티박스를 떠나는 카트 속에서 텅 빈 그린이 왠지 모를 부담감을 줍니다. 2번 홀이라  그런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었는데 말입니다. 


3번 홀에서는 수행자의 세컨드샷이 그린을 훌쩍 넘어 오비가 났습니다. 다시 드롭을 하고 쳤는데 이번엔 그린 사이드 벙커. 벙커 턱도 높은데 핀위치는 벙커 쪽 그린 에지에서 겨우 두 발자국 떨어져 있습니다. 결국 두 번 만에 탈출을 했습니다. 뭐 스코어는 이미 한참 전에 루비콘 강을 건넜는데 수행자의 분노게이지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집니다. 수행자는 이상하게 범접하기 어려운 기운을 가졌는데, 아무튼 왜 그런 사람 있죠. 싸우면 정말 한 명이 죽지 않으면 싸움이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런 분위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4번 홀부터 수행자의 입술이 굳게 닫혔고 뺨에는 CLOSED라는 싸인이 덜렁거립니다. 불 꺼진 상가처럼 활력은 사라지고 이유 없는 무거움이 육중해집니다. 


거의 모든 파 4는 앞팀이 그린을 빠져나간 후에야 티샷이 끝났습니다. 티잉 에어리어에 도착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세컨드샷은 왠지 모르게 서두르게 되며 플레이 템포가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기를 반복합니다. 덩달아 스윙 리듬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처럼 우렁차게 쏟아져 부서집니다. 


전반이 끝나기 전에 활명수도 부챗살 타법을 시작했고 심은대는 OB티를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고 수행자의 입은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활명수의 부채가 접히길 바랐습니다. 룰대로 치지 않으면 골프가 아니라는 심은대였지만 로컬룰을 언급하며 OB티를 사용하면 어떻겠냐는 상의를 하고 싶었습니다. 수행자에게는 말 좀 하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도 상의도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뜩이나 장타자 때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 덩달아 집을 나간 제 리듬을 찾기에 급급했으니까요.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었던 라운드가 끝났습니다. 이게 뭔가 싶은 느낌이 솔잎처럼 생각을 덮은 것 같았습니다. 솔잎을 치웠습니다. 하나씩 둘씩 송이버섯이 드러나네요.


역시 골프는 분위기가 중요하구나. 분위기는 전염력도 빠르지만 홍역처럼 쉽게 떨쳐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니 어떻게든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한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골프에 대한 정의가 너무 뚜렷한 동반자가 3명이 넘으면 라운드가 힘들어지네. 물론 잘 치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골프에 대한 생각이 아무리 강해도 동반자를 위해 유연해질 수 있는 골퍼가 동반자로는 제일 훌륭할 것 같네.


너무 말이 많아도, 너무 말이 없어도 좀 그렇네. 


백티를 쓰지 못한다면 라운드는 장타자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네. 제대로 맞으면 비거리 때문에 위험하니 기다리는 건 당연하고. 드라이버를 들고 오래 서있을 수록 힘은 들어가데 되서 티샷 미스는 더 잦아지는 것 같고. 심리적으로 바빠진 세컨드샷은 언제나 망가질 준비를 하게 되고... 

특히 앞팀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걸 강조하는 한국 골프장에서는 말이야. 의도하진 않았지만 그런 장타자는 다른 동반자들의 플레이와 리듬에 큰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골프 라운드를 하면서 혹은 하고 나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이 듭니다. 즐겁기만 한 라운드도 많지만 왠지 조금 걸리거나 심하면 마음에 상처가 되는 라운드도 간혹 찾아옵니다. 골퍼 스스로의 자책으로 그렇게 되기도 하지만 동반자나 캐디로 인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서로를 잘 알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부부도 오히려 골프장에서는 잘 감춰왔던 손톱과 이빨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으니 골프장 밖에서 동반자를 얼마나 잘 아는지 모르는지는 골프 동반자가 서로에게 주는 영향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장타자, 장타녀, 짤돌이, 짤순이처럼 골퍼를 규정하는 것들 보다는 어떤 사람인지가 동반자로서는 훨씬 더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또 저는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항상은 아니더라도 동반자로부터 어떤 느낌을 받았을 때만이라도 제 골프, 아니 나라는 사람을 한번 더 들여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동반자는 제가 비칠 수 있는 거울을 메고 필드에 나타난 스승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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