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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UKANG Mar 02. 2024

첫사랑 라운드

#37

카메라를 샀습니다. 렌즈는 마음 같아선 스포츠 사진기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백통 렌즈를 살까 하다 참았습니다. 골프채도 그렇고 카메라도 그렇고 작은 차이에 마음이 자꾸 쏠립니다. '이왕이면'씨가 지갑을 꺼내려는 걸 간신히 버텨냈습니다. 다양한 거리에서 멋진 장면을 잡기 위해 70-300mm까지 되는 줌렌즈로 골랐습니다. 


골프는 치고 싶은데 마땅한 동반자가 없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그냥 참고 안치려니 날씨는 왜 이렇게 화창한지... 처음엔 그냥 알아만 보려고 들어간 조인 골프 동호회와 사이트를 보고 또 보다 결국 조인을 신청합니다.


워낙 조인골프를 많이 하다 보니 처음 조인을 해 본다는 분들도 꽤 많았습니다. 쿨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었지만 나름 큰 용기를 낸 분도 많았습니다. 전혀 알지 모르는 사람과 4시간 넘게 보낸다는 사실이 한편 어색하기도 하지만 모호한 불안감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동반자를 아무런 근거 없이 의심하는 것처럼 동반자도 똑같이 나를 의심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억울했습니다. 왜냐면 전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그러니 제가 만약 동반자를 의심한다면 동반자는 또 얼마나 섭섭할까요? 모든 게 피장파장이라면 의심보다는 사랑을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더 기쁘고 행복할 수 있고 심지어 훨씬 더 안전한 선택이니까요. 사람이라면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건 쉽지 않잖아요.


이후 초면인 동반자는 거의 첫사랑이 되었습니다. 구면인 동반자는 자연스레 아쉽게 헤어졌던 첫사랑이 되었고요.

https://youtu.be/m1X7gDZTq-4


첫사랑을 만나러 가기 전날 카메라 배터리 충전 상태도 한번 더 확인하고 골프백 옆에 놓아두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부부와 라운드를 하며 핸드폰으로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찍었습니다. 멀리 페어웨이를 다정히 걷는 모습도 찍고, 파3에서는 남자티에서 먼저 샷을 마치고 부리나케 달려 여자티에서 50미터 정도 앞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티샷을 찍었습니다. 먼저 그린에 오른 후 어프로치를 하는 모습도 망원으로 당겨 찍었습니다. 


골프장에서 사진을 많이 찍지만 가까운 곳에서 핸드폰으로 스윙사진을 찍거나 관광여행용 인증사진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걸 알면 어쩔 수 없이 인위적인 포즈나 모양이 들어가게 되고 덕분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부족해집니다.


찍히는 줄 모르고 찍혔을 때 아름답고 서정적인 사진이 되기 쉽습니다. 거기에 스토리까지 담겼다면 그런 사진이 주는 만족감은 정말 찍혀 보지 못한 사람은 알기 어렵습니다. 


카메라와 망원 렌즈를 사고 또 라운드 중에 애써서 사진을 찍는 이유는 오지랖이 넓어서도 아니고 인연이 너무 고파서 어떻게든 인연을 만들려는 노력도 아닙니다.


아픈 첫사랑도 있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며 느꼈던 기쁨. 그런 내 마음을 눈치만 채 줘도 감동을 먹던 그때가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조금의 의심도 없고 그저 좋은 생각만 가득할 때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안다면 그런 방향의 삶을 살고 싶어지는 건 너무 자연스럽고 너무 일반적이고 당연한 선택입니다.


물론 사진을 찍기 전에 미리 이야기를 하고 싫다고 하면 찍지 않습니다. 간혹 그러라고 하면서도 의심의 문고리를 오히려 더 단단히 잡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첫사랑. 뭘 얼마나 대단히 잘 알고 파악하고 확인하고 시작했었나요? 당연히 그런 첫사랑도 있겠지만 저는 그냥 첫눈에 첫사랑에 빠졌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날의 라운드가 담긴 사진을 보내드렸습니다. 언젠가 나중에라도 그런 사진이 얼마나 귀한지 알 거라는 희망과 기대로 마음이 너무 기뻤습니다. 


코로나로 꽉 막혔던 2년을 탈출하고 1년 정도 그동안 주지 못했던 사랑을 주고 싶어 안달이 났었을 때 이야기였습니다. 열 번 정도 사진을 찍어주는 조인 라운드를 했습니다. 지금은 하지 않습니다. 조인 라운드로 만난 전혀 몰랐던 동반자들과의 라운드가 잦아졌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첫사랑이 쓰레기 통에 버려졌던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실망은 없습니다.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하는 행위인데 진정한 실망은 불가능하니까요.


대부분의 골퍼처럼 저도 동반자가 정해진 골프만 쳤었습니다. 물론 그런 동반자들과도 첫 라운드는 있었지만 대개는 미리 알고 있었거나 최소한의 정보는 알고 있는 경우였습니다. 그러다 동호회 골프를 시작하며 전혀 모르는 사람과의 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회원이 몇백 명이 넘다 보니 초면인 동반자와의 골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졌습니다. 물론 동호회 게시판에서 글과 댓글로 스친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굴도 알았지만 대개는 눈인사 목인사 간단 인사만 나누는 정도였습니다.


사람이 많다는 건 선택의 기회가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호감이 가는 회원들이 생기더군요. 스타트 에어리어에 정모를 위해 모여있는 회원들 중에 마음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매력적인 여자회원 쪽으로 시선이 가기도 했고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호감이 이끄는 대로 한 명 한 명 사람들마다 가진 아우라(?)를 느끼 곤 했었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자연스레 경쟁이 태어납니다. 안 그런 동호회도 있겠지만 경쟁 속에서 작은 그룹들이 생겨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아무리 동호회가 커도 훨씬 더 작은 이너써클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과만 골프를 치는 현상이 일어나더군요. 경쟁은 낙오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한 목적이 단 한 방울만 떨어져도 라운드에 담긴 사랑은 뿌예질 수 있습니다. 


이유가 분명하면 사랑은 껍질만 남게 되는 속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사랑이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사랑은 상대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거나 정복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좋은 스코어는 기쁨이 될 수는 있지만 행복은 될 수 없는 골프를 치고 싶습니다. 오직 스코어에만 집중하는 골프는 이미 너무 오래전에 버렸습니다. 골프를 사랑하고 싶지 골프가 목적 자체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는 조인 골프가 참 좋습니다. 치고 싶을 때 부담 없이 칠 수 있는데 너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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