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오패스 사용설명서 20
곱창돼지 오영오 20
수사관에게 처음 전화가 온 뒤 한 일주일 동안 서너 통의 전화통화를 더 했었다. 주로 수사를 하다 궁금한 점에 대해서 물어보는 짧은 통화였다. 어느 정도 수사가 진행이 되었는지 수사관은 나에게 만날 수 있는 가능한 날짜를 몇 개 받아가더니 영오와 함께 삼자대면을 할 날을 정해주었다. 대질신문은 통화로 날짜를 정한 후 한 삼사일 후였는데, 오후 한 시에 보기로 약속을 하였다. 앞서 말했다시피, 피해 금액이 1억 원을 넘지 않았다는 이유와 어느 정도의 변제가 이루어진 점 등의 사유로 경찰도, 검찰 수사관도 형사 고소를 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것을 느낄 수 있었기에 따로 머리를 굴려 작전을 짜진 않았다. 변호사 선생님도 얼른 형사소송을 마무리하고 민사로 돌리자는 말만 했었다. 패색이 짙었지만, 어차피 질 싸움이라면 면전에 대고 화풀이나 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삼자대면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전의 날 아침 일찍 재석이에게 전화가 왔다. 영오가 시그니엘에서 뛰어내려 자살해서 사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매우 허탈한 감정을 느꼈고 이윽고 잠에서 깼다. 꿈의 내용이 마음에 들어서일까?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오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후 한 시면 반차를 내고 갈 수 있었지만 당시 근무하던 곳이 집에서 꽤나 거리가 있어 반차를 내고 왔다 갔다 하기엔 뭔가 아까운 감이 있었다. 그래서 그냥 월차를 내고 늦잠을 잔 후 엄마에게는 오후에 출장이 잡혀 집에서 늦게 출발해도 된다고 둘러댔다. 오전에 여유가 많아 엄마가 밥을 차려주었는데, 휴대용 인덕션을 사용해서 샤부샤부를 먹었다. 지금은 영면하였지만, 당시 같이 살던 강아지에게 고기를 대부분 주고 칼국수를 먹으며 잠시 사색에 잠겼었다. 내가 오늘 흥분해서 영오에게 폭력을 가하면 며칠 동안은 가족과 떨어져 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아무리 화가 나도 잘 참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빈둥거리다가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의 다짐과는 다르게, 혹시나 유치장에 갇힐 수 있으니 최대한 편한 옷을 입을 겸 운동복 바지와 품이 큰 편인 라운드 티를 입고 집을 나섰다. 집과 검찰청이 생각보다 가까워 12시 30분 정도 도착했다. 들어갈 때는 신분증 검사를 하고 들어가는데, 생각보다 검찰청 건물의 면적이 엄청나게 넓었다. 입구에 들어가서 시간도 때울 겸 자판기에서 음료를 뽑아 마시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도 피해를 입힌 피의자와 대질신문이 있었는지 다짜고짜 마주친 사람의 멱살을 잡고 욕설을 하는 것을 목격했다. 멱살이 잡힌 사람은 급하게 경비원을 찾았지만 정말 의외로 아무도 오지 않고 멱살히 잡힌 상태로 몇 분 동안이나 둘이 이야기를 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었다. 나도 영오와의 일을 겪지 않았더라면 내 성격상 일단 눈앞에서 누군가가 폭행을 당한다고 생각하고 말렸을 텐데, 오히려 멱살을 잡은 아저씨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더 이상 흥미로운 장면이 연출될 거 같지 않아 대질신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특이한 점은 처음 들어올 때도 신분증 검사를 하였는데, 검사 방에 들어가기 전에 한 번 더 신분증 검사도 하고, 검사 방으로 인터폰을 하여 내 이름을 말한 후 약속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철문을 열어주었다. 철문을 지나치고 나서도 엄청나게 큰 공간이 펼쳐졌는데, 검사마다 한 호실씩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실신문이 있는 방에 도착하였는데 약 15평 정도 되는 공간에 검사한 명과 수사관 한 명, 그리고 비서 같은 사람 두 명이 있었다. 검사의 책상이 다른 사람의 책상보다 약 두 배정도 커 보였고, 검사의 책상과 뒤쪽의 큰 캐비닛에 엄청나게 많은 서류가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때 갑자기 예전에 재석이가 해주었던 말이 생각났다. 앞서 말했듯 재석이의 매형도 검사였는데, 매형이 말하길 읽어야 할 서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판/검사는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속독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도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고 한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생각난 동시에 이렇게 검토해야 할 일이 많으니 수사관이 나에게 까탈스러웠겠구나라고 느끼기도 하였다. 검사는 30대 후반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마음씨 착하고 모범생 같은 여성분이었다. 수사관은 대머리에 마르고 깐깐한 50대 중반의 아저씨였는데, 검사한테 엄청나게 깍듯이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검사도 역시 수사관을 존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서 같은 여성 두 분도 굉장히 친절했었다. 검사랑 짧은 인사를 하고 수사관 앞에 있는 의자에 착석하였다. 1시가 되었는데도 영오가 보이지 않아 이번에도 경찰 조사 때처럼 날 일부러 먼저 부른 거냐고 물었더니 그런 건 아니라고 하며 영오가 오기 전 나에게 먼저 질문을 시작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여러 번 이야기하였지만 왜 민사로 소송을 안 하고 형사사건으로 고소하여 공권력을 낭비하냐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저번에도 말했듯이 수사관은 수사하는 사람이지 판단하는 사람은 판사니 민사나 형사 고소를 하는 것에 대해선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수사관이 내 대답에 분개하며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나는 어차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직감하고 더 심하게 받아쳤던 기억이 난다. 왜 자꾸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오히려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고 같이 화를 내며 이야기했는데 중간쯤 내가 너무 심하게 얘기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영오가 오기도 전에 대질신문이 끝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한바탕 흥분해서 쏘아붙이고 나니 다행히 수사관의 태도가 부드럽게 바뀌며 본인도 나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설명했다시피 이 사건이 사기사건으로 보기는 불충분한 면이 있어 내가 낙심할까 봐 한 말이었고, 결코 나에게 화를 낸 게 아니라 본인 말투가 원래 이렇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츤데래처럼 같은 수사관과 서로 츤츤거리며 얄팍한 우정을 쌓아가고 있던 와중에 20분 정도 늦은 영오가 장례식장 완장을 덧대서 만든 짭퉁 톰브라운옷으로 도배된 차림으로 등장했다.
21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