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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08. 2022

종이 한 장

흑백 논리를 넘어


한 장의 백지를 들고 바라본다.

어느 쪽이 앞일까?

더 매끈하고 흰 부분을 앞쪽으로 정하면, 당연히 반대면은 뒤쪽이 된다.

 한 쪽 면을 규정하면 다른 쪽은 저절로 상대면이 된다. 꼭 상반된 것 같다. 서로 붙어 있는데 등진 것 같고, 무슨 갈등 구조처럼 느껴진다.


이 앞면을 책상에 놓으면 윗면이 된다. 뒤집어야 뒷면이 윗면이다.

같은 한 장 내의 양면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데도 자꾸만 두 면을 분리하려는 나누기 생각이 머리에 달라붙어 오랜 세월 나를 얽었다.


분명한 자기주장을 해야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

흑백논리로 설명해야 시원하다고 느낀다.

단순하고 선명한 입장 표명을 강요하여

억지로 내편 네 편 구분을 해야 싸울지 동지로 지낼지 판단하기 쉬웠다.


그러나 현실은 다양한 회색빛이다. 더군다나 농도가 변하기도 한다.

회색은 모호하고 기회주의 같은 느낌이 약삭빠른 처세의 입장 같지만

순간순간 다양성의 변화무상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내 둔함의 합리화 같기도 하다.


한 장의 종이 앞뒤 두 면은 아무리 뒤집고 뒤집어도 양면성으로 이질적이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조우하게끔 하고 싶었다. 반으로 접기도 하고 구겨보기도 하다가 문득 종이 한 장을 돌돌 말았더니 앞면이었던 부분이 안으로 말려들어가면서 뒷면과 닿는 점이 나타났다. 드디어 만났다. 그랬더니 이젠 앞뒤라는 평면의 구조가 안팎이라는 공간적 구분으로의 또 다른 상대적 분리가 되었다.


 종이를 펼쳤다 말았다를 반복하다 보니, 한 장의 종이는 2차원과 3차원을 넘나들며 공간 전체가 개방성으로 보였다. 둘러싼 벽체 전체가 개방과 폐쇄를  여닫는 출입문처럼. 대지위의 공간이 우주로까지 무한히 뻗어나가는 공기처럼. 우주의 수축과 팽창의 궤를 함께한다.


 선과 악, 적군과 아군, 옳고 그름 등의 흑백논리가 종이의 앞뒷면 구분처럼 뚜렷해야 한다는 강박이 희박해지면서,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반성은 삶과 죽음이 모두 인생이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한 쫓김이었구나 싶었다.


 앞뒷면의 나눔이 현실과 이상, 이승과 저승, 차아와 피아로 나눈  이원론적 세계관에 집착한 머지 마치 곳을 벗어난 딴 세상 같은 유토피아에 대한 존재를 확신하면서 동경해온 것라면,

오직 한 장의 종이 내에 존재하는 두 면은, 멀리 갈 것도 없이 그저 뒤집기만 하면  환기되는 일원론적 사고로 전환이 필요했기에 아직도 한 번씩은 종이의 앞뒷면을 뒤집기  해본다. 


정반대인데 딱 붙어 한 장인 게 아직도 신기하다. 아주아주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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