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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05. 2022

까치산 하얀 흑점

한 번은 크게 죽어야 산다

 일생에 정말 한 번은 경험해볼 만한 곳이란다. 세상이 좀 달라 보이는 계기가 됐단다. 뭘 하길래 그러냐고 물어도 뚜렷한 답변이 없다. 그건 경험치라 사람마다 다르단다. 대략 1주일간 머무르며 특별히 뭘 하는 것은 아닌데 나를 돌아보는 과정의 반복이라는 말 외엔 다른 얘기는 없었다. 템플스테이 같은 곳은 아니고 아무 정해진 건 없지만, 그저 시간 내서 꼭 한 번 가보란다.     


 그때쯤 사는 게 뭔지 내가 누구인지를 고민하던 때라, 참선이니 챠크라니 화두니 하는 것들에 기웃거려도 무엇도 답을 내려주지 않는 구름 잡는 날들이었다.

반은 귀찮고 반은 돈이 없기도 했기에 먹는 것조차 관심이 가지 않던 나는 도피 삼아 가보기로 친구랑 약속을 했다. 거금 28만 원을 내고.    


 일요일 늦은 오후 언양 터미널에 내리니 숙소 차량이 도착해있었다. 차 안엔 벌써 성인 여럿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끝자락엔 머리 깎은 이도 보였다. 모임 장소는 까치산 자락 계곡이 흐르는 산비탈에 자리한 2층짜리 콘크리트로 지어진 두부 모처럼 단순하고 하얀 건물이었다. 큰 방에는 이미 빼곡하게 사람들이 모여 주제자의 말을 들으며 엄숙한 분위기였다.

천도인天道人이라 불리는 그는 무애無碍의 경지를 언급하며 누구든 그 가능성이 열려있음을 얘기한다.

큰 키의 다부진 몸에 울림통이 커서 그런지

낮은 목소리에도 먼발치서 잘 보이고 잘 들렸다.

하지를 넘긴 초여름 날씨는 덥지는 않았으나 구름 낀 흐린 날에 바람 공기 멈춘 방안

사람들이 내쉰 숨 습기와 땀내로 가득했다.

     

 복도식의 방들이 늘어서 있고, 1인 1실의 각자 방을 배정받았다. 화장실 달린 6평 정도의 방엔 침구류와 작은 창문 외엔 가져간 배낭이 전부였다. 잠시 후 방에 들어온 안내자는 수행법이 적힌 책자와 먹지로 만든 새끼손톱 크기의 흑점 열 개정도를 나눠주며 본인이 편한 곳마다 벽에 붙이면 된다고 이른다. 매일 안내자가 방문할 때 수행 중 어려움이나 느낀 점을 문답할 뿐 다른 방문객들과의 잡담은 금지란다.     


 수행법은 편한 자세로 흑점을 바라보며 지금까지의 기억을 그 흑점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나는 앉은 자세에서 적당한 높이에 점을 붙이고, 선 자세 높이, 누운 자세의 천정, 화장실 일 볼 때의 문 안짝 등

내 시야 머무는 곳곳에 붙였다.     


 어려서 소풍 가고, 다치고, 중고등 때 공부하고 싸우고, 대학 가고, 군대 가고 등등의 생각이 떠오르는 족족 흑점으로 집어넣었다. 부모형제 친구 첫사랑도 모두 그 흑점 속으로 집어넣다 보니, 스쳐간 사람들과 사건들은 자연스레 동반되는 감정까지 떠올라 웃다 울다 북받치기도 하고 눈물까지 주룩 흐르기도 했다.    렇게 나는 지나온 날들을 떠올려 집어넣었다.


 벌써 3일째. 저녁마다 잠깐 방문한 안내자는 뭔가 나타나거나 일상과는 다른 느낌의 이상한 점은 없었냐고 물었고 난 답할 게 없다고 했다. 안내자는 계속 흑점 속으로 자신의 모든 기억을 다 넣어야 한다고만 언급할 뿐이었다.    


 다음날 식사를 위한 대기 줄에서 방 배정 후 처음으로 같이 온 친구를 만났다. 그는 내게 뭘 봤냐고 물었고, 나는 아직 별 것 없었노라 했더니, 씩 웃으며 더 해보란다. 너는 어땠는데 하고 물어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말을 해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그 모습에 부러움과 시샘과 분노가 가슴을 콱 막았다. 저놈이 본 세상이 뭔지 미치도록 궁금해도 내가 직접 본 게 아닌 이상은 설명이 의미가 없었다. 뺏을 수도 훔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뭘까? 뭘 본 것인가?


 다시 흑점을 바라보고 앉았다. 이제 웬만한 기억은 없 싶어도 또 돌이켜보면 평소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던 흔적들이 마른 종이의 물 얼룩 마냥 남아있었다. 블랙홀 속으로 밀어 넣고 또 밀어 넣었다.

그런데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기억들을 흑점으로 넣어도 그 기억을 일으키는,

그 흑점을 응시하는 나는 여전히 두 눈 땡그리 뜨고 앉아있지 않은가?     


아, 이 놈마저 저 속으로 집어넣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이게 남았네하고 나를 밀어 넣는 순간, 그렇게 기억과 감정을 거침없이 빨아들이던 블랙홀은 내 몸을 거부했다.

 아니 내 몸이 거부하고 있었다. 저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이 악물고 버티는 엄청난 저항의 몸부림은 뒷걸음질 치는 소를 끌어당기듯 버거웠다. 몇 번을 시도해도 내 의식이 이 몸이라는 인식을 흑점에 집어넣으려 들면 반발력처럼 튕겨지고 다시 넣으려면 도망치고 빠져나와 흑점과 일정 거리를 두었다. 보통이 아니다. 맨손으로 미꾸라지 잡기만큼이나 어렵다.

손 의지할 곳 없는 절벽을 오르듯 도저히 방법이 없다.

   

 밖으로 나갔다. 한 밤중의 장대비가 쏟아지고 그렇게 굵은 빗방울이 바닥에 내리 꽂혀도 난 빗소리를 듣지 못했다. 뿜은 담배 연기는 내리는 빗줄기랑 아랑곳 않고 붕 위로 흩어졌다.

여기서 끝낼 수는 없다. 시간이 없다. 날이 밝으면 짐을 싸야 한다. 다시 방안에 들어앉았다. 흑점을 향해 들어가길 버티는 몸에 칼을 빼들었다. 어깨를 내리치고, 허벅지를 자르고, 허리를 끊었다. 그래도 거부하는 몸 일부는 다시 난도질을 해서 집어넣었다.     


무력해져 쪼개진 몸뚱이를 밀어 넣기는 통째로 넣을 때보다 수월했다. 그렇게 끝나나 싶었는데 아직도 그 흑점을 보고 있는 내 눈과 의식이 남았다. 이것들마저 집어넣어야 한다. 난간에 매달린 손을 놓듯이 버려야 한다. 기꺼이. 차례 시도 끝에 그렇게 나는 흑점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의식이라고 할 것 없는 어떤 덩어리는 무중력이다. 비 그친 밖은 바람이 불고, 초여름 새벽은 어슴푸레하다. 불은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가 세차고, 산 밑의 오리 농장엔 꽥꽥 소리 분답다. 비 온 뒤의 조각 먹구름이 내 발밑에 있고, 난 바람이 되어 하늘 높이 떠오른다. 보고 듣 느낌들은 그대로인데 자유롭다.    


 짐 싸고 밖을 나오니 친구가 손짓을 한다. 봤냐는 그의 물음에 그냥 씩 웃었다. 오리도 정답고 구름도 가뿐하다고 했더니 놀란다. 말없이 어? 하는 표정이 자기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말하는 듯했다.

귀가하는 버스에 앉아 밖을 보니 길거리 사람들은 분주하다.

 흑점 속으로 사라진 과거는 현재를 지우고 미래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돌아가 누가 거기 어땠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나 또한 먼저 갔다 온 이들의 말처럼 답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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