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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12. 2022

늦된 사춘기

냇물은 웅덩이를 채우고 나아간다

스쳐 지나갈 순 있어도 건너뛸 순 없나 보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나는 몸살을 했다. 중학생 때 흔히 겪는 사춘기를 별 반항이나 고민 없이 보낸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공부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불안하고 미래에 대한 회의가 들더니 급기야는 고3에 올라가서는 자율학습과 수업을 땡땡이치기 시작했다.   

  

 담장을 뛰어넘다 만난 친구들은 나를 반겼다. 수업 중 주로 뒷자리에 앉아 엎드려 졸던 그 친구들은 내게 고3 수험생이 이러면 되냐며 같이 언덕에 앉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막걸리와 담배로 노래 부르고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나 그들과의 어울림으로도 나의 채워지지 않는 답답함을 대신해 주진 못했다.    


 어느 날 새벽 문득 잠을 깬 나는 집 밖을 나와 걸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중공업 정문까지 닿았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붐비는 버스 안에 있던 회사원들이 정류장에 내려 바삐 출근을 한다. 꽉 찼던 버스는 텅 비워내고 다음 정류장으로 향하고, 뒤이은 만원 버스도 떠날 땐 남은 승객 몇 없었다. 인도를 꽉 채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회색 출근복이다. 그 속에 사복 입은 스포츠머리의 학생이 이질적으로 서있다. 잿물 흐르는 도랑에 솟은 돌멩이처럼.

   

 회색의 인간 물결은 미래의 내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발버둥 쳐도 거대한 회색 블록 중의 하나가 되어 쓸모없어지면 교환되어 폐기되겠지. 어쩌면 누구나 그런 건 아닐까? 아버지도 그렇고, 주변 어른들처럼 언젠가 나도.

선생님께 사는 의미를 물었다가 지금 제정신이냐고 공부나 하라는 꿀밤만 맞았다.

아, 그냥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가는가?

나이 들어 인생 별 것 없구나를 알았지만

그렇다고 무가치한 건 아님을 들려주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치열해야 할 수험생활을 방황하며 보냈으니, 별 기대 없는 대학 입학은 소모적인 생활이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일단 군대를 가자. 단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제대 후 아버지께 겨우 재수 허락을 받아냈다. 딱 1년만 시간을 달라고. 그리고 노량진 행.


  2월. 대학교 근처의 하숙방을 잡았다. 2인 1실의 좁은 방은 각자의 책상을 뺀 공간에 이불을 깔고 누우면 그나마 다리는 뻗었다. 5시 반에 일어나 대학 도서관 구석진 독서실의 한 칸을 잡았다. 그땐 학생증 검사를 하지 않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었다. 물론 본교 학생을 대상으로 했으나, 나는 그걸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앉아 책 보는 게 영 익숙지 않았다. 앉아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공부와 담쌓은 지 몇 년이라 막상 10분을 앉았어도 금방 몸이 근질거렸다. 졸든 커피를 마시든 무조건 1시간을 앉아있는 연습을 했고, 거의 한 달 가까이 3월이 되어서야 겨우 적응이 되어갔다.    


 그렇게 도서관-학원-하숙집의 단순 생활을 하던 5월. 날씨가 더워지고 나드리 차림의 길거리가 부러울 때, 나와 같은 처지의 고향 친구 2명을 학원에서 만났다. 그들은 학원 근처 사설 독서실에서 생활하며, 매식을 하고, 잠도 독서실에서 의자를 치우고 독서실 바닥 침낭 속에서 잤다. 넓은 독서실 바닥에 누우면, 저만치 누군가의 슬리퍼 신은 발이 보이고,  멀리서 들리는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 아직도 책 보는 상의 반사광 불빛, 어딘가의 속삭이는 거슬림 들은 휴식을 방해했다. 돈을 아끼려는 선택이었지만, 계산상 나와 비슷한 비용이 든다고 해도, 조급한 마음까지 겹쳐서 그런지 그들은 지금의 생활도 나쁘지 않단다. 몸을 망칠까 걱정되고, 아직 몇 달을 버티려면 결국은 체력의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아 규칙적인 생활을 권했지만 더는 말을 못 했다.    


 첫 모의고사는 참담했다. 수면시간을 줄이면 낮의 졸음이 더 길게 보충을 해버렸다. 끝까지 간다는 자세로 버티니 성적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던 8월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무지개 색 꽃이 피었다. 초점을 맞춰 책을 볼 수가 없었다. 안과에서는 망막이 부어 나타난 증상이니 눈을 자주 감고 쉬어야 한다고 했다. 이틀을 거의 잠만 잤다.    


 10월. 아직 시간이 부족한데 시험 날짜는 점점 다가왔다. 최종 모의고사 성적으론 가려는 대학의 예상 컷라인 아래였지만, 지금의 추세로는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졌으면 하고 바랬다.


12월. 학력고사 전기 시험을 쳤다. 작년에 비해 수학 시험이 쉽게 출제됐다. 이렇게 쉬울 리 없다고 검산까지 하는 통에 시간 배분에 쫓겼다. 결과는 낙방. 나름 충분히  만큼 했기에 실망도 미련도 적었다. 다시 시간이 주어진 대도 더 열심일 수 있을까 싶었다. 1월에 있을 후기 시험에 더 이상 애착이 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예상에 없던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시험이 20일가량 연기되었다. 초유의 시험지 유출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세상에.. 그렇다면 가야지. 그렇게 다시 신입생이 되었다.    


 늦게 찾아온 사춘기가 하필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시맞춰 나를 흔들었다. 흔들리며 헤맸고 아쉬웠다. 이렇게 놔둘 순 없었다. 실컷 울기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얻은 기회라서 력했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결과의 향방에 상관없이, 더 이상 늦은 사춘기의 방황이라는 궁색한 합리화하지 않기 위해..


흐르는 냇물은 웅덩이를 피해 가지 않는다.

웅덩이를 충분히 채워 흘러넘쳐야 계속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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