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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Apr 21. 2023

묵은 편지

차마 버리지 못하고 가슴에 남아

10여 년도 더 오래 묵은 메일 편지를 나는 삭제하지 못하고 있다. 간혹 한 번씩 꺼내보는 그 편지에는 형이 내게 보낸 장문의 가슴 저린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읽다 보면 그때의 상황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면서도 희망이라는 고문 같은 행복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뿌연 황사 너머의 실루엣처럼 답답하고 아련하다. 그리고 읽다 보면 너무나 형에게 미안한 생각들이 한가득이다. 또다시 형을 만나게 되면 어떻게 풀까 할 말이 얼마 남았을까 싶다.


국내에서의 사업들이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아서 형은 중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개혁개방으로 경제 성장세를 이어가던 중국에서는 2002년 베이징 올림픽 개최까지 따내며 외자유치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중국에서의 장밋빛 얘기들이 파다했고, 형도 그 흐름에 올라탔다. 자본과 기술은 형이 맡고, 재료와 인력은 중국인이 맡은 투트랙의 사업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합작법인의 형태로 사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3년을 사업에 매달리던 중 아버지의 부고가 형에게 알려졌다. 그 쯤 집안 사정은 참 어수선했다. 갓 졸업하고 결혼한 나도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당장 엄마의 생활비를 누군가는 대야 했다. 그런 데다가 오랫동안 불안정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누이는 결국 이혼을 하고 아이 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형의 편지들이 시작되었고 십여 편의 편지가 오갔다. 혼자 남은 엄마를 내게 부탁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과 내가 누이와 같이 일하게 된 것에 대한 형의 생각들이 담긴 내용들. 그리고 사업의 부침으로 몸도 많이 상한 형의 외로움과 고달픔들이 구구절절한 사연들.


그때 나는 형을 많이도 원망했던가 보다. 형에게 장남의 역할을 하라고 다그치기도 했고, 고부갈등으로 내 내부적 고민들이 폭발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이혼 후 애 둘을 키우는 누이의 끊임없는 신경질적 반응과 홀로 된 엄마의 판단 부재와 모호한 자리매김으로 결정과 중심을 잡아야 하는 집안일들은 의견 분분으로 더욱 꼬였다. 


갑자기 경제적으로 급성장한 중국인들은 사업이 시작할 때는 도와주는 액션을 취하다 막상 사업에 이익이 나는 게 보이면 중국 당국 특유의 딴지가 형을 힘들게 했다. 사업은 그럭저럭 진행됐지만 막상 수익이 나도 돈을 손에 쥐기가 쉽지 않았던가 보다. 그렇게 몇 년을 버티던 때의 형의 편지에는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들이 몇 차례 나온다. 이제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얘기, 그래서 조만간 우리 가족 모두 세계 여행이라도 함 가자는 말들을 남기며.


결국 형은 중국에서의 사업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몸만 빠져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형의 능력 부족이나 잘못이 아닌 중국 정부와 당국의 시책에 따라 정책이 뒤바뀌기도 하고 중국 사회의 외국인 차별로 인한 사업 실패가 더 쓰라렸으리라. 하나도 건지지 못하고 귀국을 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때 형의 눈빛은 초점을 잃은 멍한 상태 그 자체였다. 만약 나였다면 버락버락 세상을 저주했을 것 같은데 형은 다행히 몇 달을 방황하다 다시 방향을 틀었다. 캐나다 이민. 그 와중에 페인이 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형은 모든 걸 털어버리듯 낯선 곳으로 간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내게 다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며 고개를 숙이고 눈가를 적셨다. 


그땐 그랬다. 그리고 모든 게 안정된 지금, 형의 편지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리고 눈물이 났다. 빈손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캐나다로 간 형은 여러 곳을 전전하다 이젠 나름 자리를 잡았다. 중견기업 임원까지 올랐으니.


그러고 보니 문득 난 형에게 해준 게 없다란 생각이 들었다. 형이 환갑이 넘도록 내가 형에게 준 게 하나라도 없다는 생각에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내년이든 내 후년이든 형을 만나게 되면 선물을 해주고 싶다. 예전 형이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참 군부독재로 세상이 어지럽고 젊은이들은 거의가 데모를 하던 그때쯤. 형은 시국에 대한 반발로 양쪽 눈썹을 면도기로 밀었던 기억이 났다. 그 후로 눈썹은 수염처럼 자라지 못하고 코끼리 이마털처럼 성글게 드문드문 형태만 유지하는 정도로 자리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눈썹문신이다. 눈썹 문신을 선물해야지.


그래서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혹 언제 올는지 그리고 문신 어떤 지하고 물었다. 그리고 형이 눈썹을 면도기로 깎아서 지금도 그렇게 눈썹이 없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형은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형의 눈썹이 지금도 드물지 않냐고 하니, 그렇긴 한데 면도질은 아니란다. 


난 어려서부터 나름 의식이 깨어 세상을 바로 보려고 애쓴 형으로서의 눈썹을 기억하는데 형은 의외의 답변을 한다. 얼굴에 여드름이 났는데 하필 왕여드름이 눈썹 주변으로 몇 개 나서 여드름을 짜는 과정에서 눈썹 모근도 같이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눈썹이 드물어졌다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이게 뭐야 하는 헛웃음이 킥킥하며 나왔다. 어이없는 대답이었지만, 눈썹 문신을 시켜주겠노라 말을 한 후라 순간 다시 취소하기 뭤했다. 그래? 응! 그렇지만 네가 선물한다니 잘 받을게. 


묵은 편지를 읽는 지금의 나는 기억의 짜깁기 편집으로 뭐가 진실인지는 몰라도 그건 하등 중요치 않다.  아련한 추억으로 잠시 옛 감정을 한번 쓰다듬은 것으로 족하다. 상처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냐고 할지 몰라도 아물었으면 그것으로 넘어간다. 그래도 된다. 그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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