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현재가 달라진다. 이제 영원히 못 볼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면 지금이 절실해진다. 꼭 그렇게 낭떠러지에 내몰듯 끝까지 밀어붙여야 우린 놀란 눈으로 환기를 하나 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조바심을 내고 불안에 떨기보다는 현재에 좀 더 충실해 보려 한다. 그리고 당연히 우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곡해와 반목으로 형제들에게 따돌림당하고, 엄마마저 나에게 등을 돌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억울하고 답답함에 늦은 밤 혼자 길거리를 헤매다 다짐하듯 엄마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래요, 정 그렇다면 이제 내가 물러서야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앞으론 엄마집에 안 올게. 돌아서는 나를 엄마가 뒤에서 보고 있다는 시선을 느꼈지만 끝내 앞만 보고 나왔다.
외면받고 단절됐던 어느 날. 길거리 시장에서 엄마랑 꼭 닮은 키 작고 허리 꾸부정한 흰 노인을 봤을 때 숨고 싶으면서도 그렇게 마음이 두근거렸음에야. 엄마가 아니었다. 그런데 다행이란 생각이 어이없이 든다. 왜 내가 외면하고 왜 나를 떠미는지 모르겠다며 미어지는 마음에도 고개를 흔들었다.
버스 타고 가는 길에 언뜻 '저기 엄마구나' 하는 인도를 걷는 어떤 이를 봤을 때, 버스는 너무나도 빨리 도로를 달렸다. 순간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뒤달려 가볼까 하는 망설임이 스쳤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한 번은 집 대문에 검정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메모도 없고 단서도 없다. 봉지를 뜯어보고는 엄마일 거란 확신을 했다. 콩잎 물김치. 비슷한 제품은 있어도 이 김치 국물은 살 수 있는 맛이 아니다. 눈 질끈 감고 매몰차게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흘러넘치는 국물에서 퍼진 냄새는 이미 내 손등을 타고 떨어진다.
그렇게 3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이 모든 사태가 누군가의 모함이요 농간임이 밝혀졌을 때, 어쩌면 본인도 피해자이면서 한편으론 오갈 때조차 없어져 그랬는지는 몰라도 엄마는 내게 자신이 미련해서 그랬노라 사과를 한다. 몇 번을 미안 타고 하는 엄마를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다시 3년이 흘렀다. 팔십 대 중반의 엄마는 이제 오늘내일이라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마지막 이후의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 어제의 오늘도 내일의 오늘도 매일 연락하고 만난다.
뒤돌아 서 본 사람은 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회고하지 않으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러는 게 아니다. 떠나보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언제 떠나든 무겁지 않으려고 하는 거다. 가볍게 '안녕'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