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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Oct 05. 2023

지금이 형용태

내가 선 곳, 그의 지평선

시간이 무한정 주어졌을 때 우린 그 시간을 제대로 향유할 수 있을까?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하다 막상 많은 시간이 주어지면 시간을 시간인 체로 흘려버리고 만다.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이 행복하면 마냥 좋을 것이라 생각도 정작 행복이 주어졌어도 다시 행복을 찾는다. 사랑도 그렇고 삶도 돈도 그러하리라. 추상적 개념에 대한 나름의 정의와 정도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개념은 원래 막연하다. 그래서 사랑이나 행복을 대상화시키거나 어떠한 상태라는 형용으로 표현되지만 규정하기 힘들다. 개인적 차이가 있지만 모호한 개념에 나름의 구체성을 부여한다.


그렇게라도 범위를 정해두면 헤매는 정도가 줄어든다. 목표가 된다.  구체적 상황이 뚜렷이 그려지고 명확한 정도의 선이 어진다. 분명해진다. 그러나 그 선명함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한계 상황이 된다. 목표를 이뤄야 할 대상으로 보면 그 목표를 달성한 후엔 더 큰 혼란이 올 수 있다. 다시 방향을 잃은 것이다.


그 구체성이 '상태의 지금'이면 좋겠다. 지금 여기서 자유롭고, 행복하고, 넉넉하게 자족이면 충분하다. 딴 곳에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다를 희망은 현재의 부정이요 부재다. 그럴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 구현되어 있다. 


눈에 보이고 잡힐 듯한 지평선. 그 지평선을 만나러 한없이 다가가도 지평선은 여전히 지평선이다. 좁혀지지 않는 저 지평선. 닿으려는 그 지평선 끝에  누군가가 서서 이쪽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본 지평선에는 내가 서있다. 지평선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내 발 디딘 이곳이 지평선의 연장선이다. 이미 지평선상에 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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