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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Mar 22. 2022

봄을 가져와봐

봄 속 사계

- 이쯤 됐으니, 오늘은 봄을 함 가져와 보게.


늘 자상하게 조목조목 가르쳐주시던 백발의 선생님 제안에 다들 당황스럽다. 소문으로 알음알음 모여 결성된 공부 모임이 해를 넘겨 이어지고 있다. 공부방은 따로 없이 선생님 자택에 둘러앉아 유불선을 넘나들며 토론을 한다지만 대게 선생님의 강의 위주로 진행되어 왔다. 오늘은 뭔가 점검을 해보고 싶으신 게다. 매실이 잘 익어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 익었는지?


춘분을 지났다곤 하지만 아직은 음력 2월이다. 오전의 쌀쌀한 기운으로 한껏 웅크리다 오후의 햇살에 노곤해지는 날씨다. 마당엔 따뜻한 봄빛이 가득한데 머리 굵은 학생들의 앉은 공간은 침묵이 흐른다. 선생님은 평소 부드럽다가 한 번씩 따끔하게 이르실 때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듣는 이의 등식은땀 흐르게 할 정도로 서늘하다. 분명 봄을 얘기하는데 아직은 춥다.    


- 허허, 참. 하나씩 꺼내 보게.

서로 눈치를 본다. 선생님은 편하게 말하라고 하지만 감히 선뜻 나서기가 뭣하다. 앞자리에 앉아 항상 모범을 보이는 반백 나이의 학생이 헛기침을 하며 먼지 말문을 튼다. 타 학생들은 그를 거의 수제자로 대우해주기도 하지만, 그는 언젠가 돌아가실 선생님께 하나라도 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이 급했다.


= 이렇게 좋은 봄날을 보니 마치 물고기가 수면 위로 유유히 떠올라 살랑이는 지느러미가 부드럽습니다. 매화가 피고 밭에 쑥이 자랍니다.

- 겉만 보고 전부인양 마라.

최근에 책에서 본 봄맥春脈의 구절이 떠올라 호기롭게 먼저 말문을 텄는데 선생님은 은근히 누르신다.

학생의 답이 틀려서가 아니라 치켜세우면 날뛰는 성격을 달래려 외면한다. 학생들에 항상 고집하지 마라, 꼭 그것만이 정답이라고 주장 하지 마라라고 하신 말들은 기실 그를 앞세워 한 의미도 많았다.    


= 아직 바닥은 차갑습니다. 겨울의 음 기운이 다하고 서서히 양 기운이 올라오는 봄은 소양少陽의 기운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 그 또한 잊으면 안 될 터.

= 얼은 물이 녹고, 나무엔 물이 오릅니다.

=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볍습니다. 그러다 자칫 추워지기도 하니, 봄은 바람처럼 변덕도 심합니다.    


그래 그래 하시더니, 또 없냐고 물으신다. 다들 앞 선 얘기에 고개만 끄덕일 뿐 더 이상 말이 없다.

선생님은 제대로 된 봄이라고 하려면 잘 버텨낸 겨울이어야 자연스럽다고 하신다.

- 혹한에 너무 시달린 겨울을 보냈다면 봄이 왔어도 봄을 받아들이기가 힘들 것이고, 춘삼월을 맞아도 움트는 모양이 시들시들하겠다.

잔뜩 웅크린 겨울의 묵은 기운을 떨쳐내고 마당을 거니는 봄기운은 결코 약하들 않지. 사람들은 더운 여름의 기온만 보고 성하盛夏의 치솟는 열기가 더 드세다고 하지만, 한겨울을 뚫고 올라온 봄기운 또한 못지않거든. 마찬가지로 그 엄청난 여름의 열기를 꺾는 가을 기운은 또 어떤가 말이지. 기실 춘하추동이라 해도 기운의 움직이는 모양새가 다를 뿐이지 기세는 봄여름이 똑같다고 봐야지.  그래서 치료도 현 상태뿐 아니라 전체적 기운을 같이 고려해야 조화로울 터. 계절도 보고 그의 생기도 살펴야 안 되겠나?

 

= 봄이 왔다고 너무 서두르면 웃자라듯 빨리 자라게 되면, 뒤에서 받쳐주는 힘이 약해져 문제겠습니다.

- 그래서 봄의 생발生發 기운이라 하더라도 수렴을 끼듯 하고 있어야 돼. 꼭 겨울 이후에 봄이라고 시간 순서로만 보지 말고, 봄 내부에 겨울 수렴력을 간직하면서 발산하는 봄기운으로 少陽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 자칫 과도한 승달 기운이 너무 앞서지 않게 좀 잡아주는 맛이 있어야 그래야 정당한 봄으로 나아가 여름으로 이어지겠다. 인생 계절도 그러겠제? 이제 좀 생활이 좀 낫다고 고개를 치뜨면 가볍다 이 말이지. 항상 음양이다.

   

나타난 현상의 이면을 본다는 게 실은 전체 속에서 현재를 살핀다는 뜻 같은데 쉽지 않다. 봄 안에 사계요,  사계 속에 또 봄이 있으니.


봄을 좀 더 논해보자고 운을 띄우는 사이 학생들은 조금씩 긴장을 풀고 농담도 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저기 끝자락에 졸고 있던 학생은 소란에 놀라 눈을 번쩍이고 가슴을 펴고 두리번거린다.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입맛을 다시는 폼에 이미 들켰다. 누군가 농을 친다.


= 저 봐라. 봄 가져오다 봄에 푹 빠졌구먼.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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