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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Dec 07. 2023

고립된 수신(修身)

날카롭다

초겨울의 해가 지면서 바람이 세다. 영하 가까운 온도가 바람에 의해 추위의 체감도를 더 낮춘다. 시간에 맞추기 위해 바쁜 걸음으로 약속 장소로 간다. 동네 개천의 거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복개천 다리 밑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너 나목 된 벚나무 아래. 


다행히 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개천에 설치된 데크에 서서 담배를 한대 피운다. 또 한 해가 빠져나간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저 멀리 목도리에 장갑을 낀 그가 왔다. 커피숍을 향해 가면서 나는 그가 부탁한 물건을 건네고, 그는 귤잼을 만들었다며 내민다. 넓은 통창으로 장식된 트리가 반짝이는 커피숍엔 손님의 없다. 우리는 뜨거운 커피를 시키고 앉는다.


지난 주말 본인의 생일에 맞춰 서울서 딸내외가 왔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딸이 문득 "아빠와는 30분 이상 얘기하기 힘들다. 아빠처럼 살기도 쉽지 않지만, 아빠의 삶이 꼭 정답은 아니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강요처럼 들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갑자기 분위기는 싸해졌다. 그는 내게 이 말을 건네며 어두워진 창 밖으로 시선을 넘긴다. 막상 보이는 건 밖이 아니라 밖을 보는 그의 반사된 흐린 실루엣이다.


자기 통제가 뛰어나고, 올곧은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그에게 딸의 한마디는 어찌 보면 그의 생애 전체에 대한 평가처럼 보였다. 잘 못 살아왔다는 것이다. 좀 더 편하고 윤택하게 살 수 있는데도 그의 인생관으로 인해 가족은 그리 부유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본성에 반하는 도덕이나 규율을 지키는 생활이 요즘의 세태와 맞지도 않다는 반박이다. 


그의 부인이 나중 그에게 조용히 이른다. 난 당신의 삶을 존중해. 이걸 부정하는 게 아냐. 그러니 오해 말고 들어줘. 당신은 너무도 열심히 살아왔어. 딴 곳으로 눈길 한 번 돌리지도 않았고. 수양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온 거 대단해. 그런데 그런 수신修身의 과정과 단계는 본인을 위한 것이라 제가齊家에는 소홀한 거 아닐까? 넓은 의미의 이기주의이기도 하지. 스스로를 닦아 세상을 구하려는 듯이 보여. 욕심이 과해. 이상주의자이기도 하고. 물론 그런 삶을 나도 존중해. 그러니 지금껏 같이 살아왔지.


명상과 공부를 손에서 놓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식욕과 수면욕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는 그는 요즘 보기 드문 수도사다. 경제적 쪼들림에도 하늘의 공정함을 믿는다. 주변의 그를 아는 지인들은 그의 생활에서 많은 힌트를 얻기도 하고, 지침의 일부로 삼기도 하며, 자문을 청하는 경우도 드러 있다. 


부인과 딸의 생각이 그와 다르다고 그의 인생관이 바뀔 것 같진 않다. 내 주변에 이런 부류의 사람이 있어 귀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감사한 일이다.


최근 읽은 간신론에 관한 책을 언급하니, 그는 내게 너도 그런 욕망을 꿈꾸냐는 식으로 묻는다. 식은 커피를 삼켜고 미소를 지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 알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욕망은 종류도 다양하고 그 끝 또한 끝없이 확대된다며 욕망 탐구보다는 흔들림 없는 수양의 깊이를 강조한다.


간신론은 인간이 권력과 욕망을 향해 얼마까지 비굴해지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이다. 내게 있어 욕망은 긍정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정도 아니다. 욕망으로 인간이 얼마나 염치없고 무서울 수 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엿보고 싶은 것이다. 즉, 욕망의 인정이다. 내 속에 있을 수 있는 욕망에 대해 나 또한 예외가 아닐 수 있다는 인정. 그러한 욕망의 인정을 통해 그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 경계하고 점검하는 것이다.


간신들은 두뇌 회전이 빠르고 사태 파악에 능하며 처신의 귀재들이다. 다만 그들의 능력이 본인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인다는 점에서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은 관심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관된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한다. 타고난 간신들도 있지만, 충신에서 출발하여 간신으로 변신하는 경우도 많다고 책은 여러 사례를 든다. 어찌 보면 그들도 나름 사기꾼으로 탁월한 인물들이다. 훌륭하거나 존경과는 정반대이긴 하지만. 나의 욕망도 간신 행위로 빠질 위험성이 전혀 없을까? 이익에 휘둘릴 가능성이 전무할까? 비겁할까 봐 불편한 거다.


그의 극기 훈련 같은 얘기가 이어진다. 야간 공복감으로 온몸이 비틀어질 정도의 괴로움을 참고 견디다 잠들면, 다음날 새벽 기상 후 정말 몸이 가볍다고 한다. 경험이 별로 없는 나는 고개만 끄덕인다. 나의 경우엔 배고프면 배고픔을 받아들여 음식으로 때운다. 버팀보다 인정. 오늘은 아닌가 보네 하는 정도에서 실패를 받아들인다. 그래 그런 날인가 보네. 어찌 보면 타협을 한다. 그의 뉘앙스에서 그렇게 살지 말라는 의미를 모르지 않지만, 그렇게 자꾸 물러서다 보면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를 보며 물이 너무 맑은가 싶다. 이 악물고 버틴다. 그러다 부러질까 걱정이다. 그러다 외면받을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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