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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Dec 14. 2023

메마른 저림

묻어둔 어두움의 슬픈 외로움

모르는 번호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하는 망설임도 잠시. 스팸이나 피싱과는 다른 뭔가 정직한 번호라는 느낌. 동시에 등골에서 냉기가 훑어 내려가는 싸한 기분. 여보세요? 누구시죠? 혹시 누구 아니신가요? 예, 맞습니다만 어디세요? 예, 대구의 구청에서 전화드립니다. 혹시 부친이 누구 아니신가요? 예, 맞습니다만 무슨 일이신가요? 예. 부친께서 사흘 전 돌아가셔서 연락드립니다. 과거 등록을 겨우 찾아 이제 연락드리는 겁니다.


노숙자 숙소에서 요양원으로 입소할 때부터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지만 자칭 무연고자라고 했단다. 중풍 후유증에 시력저하로 거동이 불편했지만, 의식은 또렷하여 대화에 이상은 없었던 노인. 그는 사망 전 자식을 보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었던가 보다.


40여 년 전의 일이다. 잘 나가는 대기업 창단 멤버로 입사하여 10여 년간 잘 다니던 회사를 부친은 갑자기 퇴사를 한다. 집도 두어 채 마련하여 뒷배를 마련했고, 사업구상도 끝났다. 부친 덕분에 입사한 이들은 이 좋은 곳을 두고 왜 떠나시나 갸우뚱했지만, 사업을 한다는 말을 듣고는 더 잘 살려고, 사장을 하고 싶어 그러는가 보다 하고 부러운 눈길들이었다. 뽐내고 으스대기 좋아한 모친의 어깨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곧 사모님이 될 꿈을 꾸며.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는? 묵직한 낚싯줄에 걸려 딸려오던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순간 줄이 끊겨 놓친 물고기다. 느낌만 있고 실체는 볼 수 없는 상상의 물고기이기 때문이다. 손맛이 얼마나 좋던지라고 자랑하며 입맛을 다신다. 그렇게 큰 물고기를 다시는 잡을 수 없을 거라고.

손 끝에 닿는 느낌은 있으나 쥘 수 없는 물건을 잡으려 용을 쓸 때가 가장 아쉽다. 뭔가 가능성을 봤기에 더욱 집착한다. 될 듯 말 듯한 느낌. 그러나 그건 이미 내 것이 아닌 거다. 그러다 망친다. 미련이 남을수록 미련해진다.


생각 같아선 거의 확실하게 될 것 같은 사업이 조금만 조금만 더하면 끝날 것처럼 애를 태울 때 무리수를 둔다. 부친의 화려한 청사진도 성공의 희망을 펼치다 빚만 남긴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기도 했겠지만, 주변의 동조와 부추김에 힘입어, 투자한 금액이 아까워서 멈출 수도 없었다. 집을 날리고, 주변까지 끌어들이다 더 이상은 안 되는 상황에 맞닥뜨려서 멈춘다. 그렇게 멈춰진 사업은 이제 후폭풍이 심하다. 결과론적 얘기지만, 지나친 확신은 보이지 않는 맹점이 되어 앞뒤를 잴 수 없는 오판을 남긴다. 그 오판의 중심에 가족들이 있었으니.


한계에 다다른 사업은 그렇게 망했다. 모친의 원망이 극에 달하고, 부부싸움도 끊이질 않았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모친의 독설에,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당신과 결혼한 줄 아느냐는 자존심 상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옴에 부친은 결국 집을 나갔다. 별거의 형태지만 내쫓김에 더 가깝다.


빚쟁이들은 연락두절의 부친을 찾아 수소문을 해댔고, 몇몇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자식이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간다. 네 아버지 어디 계시냐? 걔 중에는 친구 부모도 있었다. 너무 부끄럽고 힘들었다. 집안 분위기는 우울하고, 돈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버스비 아끼려 학교까지 걸어가곤 했던 아들은 고등학교를 그만둘까 하고 방황하던 차에 우연히 그림을 접한다. 그림에 몰두하는 순간만은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유일한 낙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그렇게 고교를 졸업했다. 아들이 성인이 되자 모친은 부친과의 법적 남남임을 확정한다. 이혼.


아들은 직장을 구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간간이 접한 부친의 소식. 부친의 근황을 모친에게 이르는 날엔 모친은 불같은 화를 내고 욕설을 하면서 그 인간 때문에 내 인생 망쳤다는 말을 무한 반복한다. 연락이 드문 아버지의 소식을 접해도 그 이후로 모친에게는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하다 부친 안부를 묻는 이도 있었다. 그러면 그는 우리 아버지 죽었다고 말하고 다녔다. 친구들 경조사를 그렇게 많이 다녔으면서도 본인의 대사를 치를 상황에서는 누구 하나 연락을 취할 이 없었다. 이미 죽었기에.


아들이 부친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손주 유치원 입학날이었다. 손주에게 따뜻한 옷가지 사주라며 흰 봉투를 두고 떠났다. 부친의 사진 한 장도 옆에 남겨두고. 이게 영정사진이 될 줄은 몰랐다. 1년에 한두 차례 오가던 전화도 드물어진다. 아들은 아들대로 삶이 고달팠다. 노동으로 먹고사는 처지에, 처자식 돌보기도 힘든 판에,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쁜 날들이기에 뜬금없이 부친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가슴 한쪽에는 늘 무거움을 끼고 있었다.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닥칠 일이 하나 있겠거니라는 막연한 쓸쓸함을 안고.


부친은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며 사신 것 같다. 떠돌이 같은 생활을 전전하다 어느 날부터는 자식과의 연락도 끊는다. 자신의 존재가 민폐 되어 그들에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거처였던 요양원의 담당자는 부친 앞으로 된 통장과 요양원 입소해서 필요물품 구매 영수증을 같이 내민다. 부친은 입소 당시부터 무연고자라서 휴대폰이 없다 했단다. 그래서 연락이 늦었노라고 한다. 아들은 통장 정리를 하면서 매달 몇 천 원씩 통신료 이체내역이 찍힌 걸 본다. 지금까지 돌봐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화장막을 나와 시립 납골당에 임시 보관 거쳐로 정한다.  


어려서 술을 좋아한 부친은 밤늦은 귀가에 자주 간식을 사 왔다. 얼큰하게 취한 손으로 자는 아들을 깨워 입안에 쏙 과자를 넣어주었다. 아들의 기억에 아버지는 그래도 정이 많은 좋은 사람이었다. 엄마와 달리 손찌검 한번 하지 않았고, 욕을 하지도 않았으며, 어깨를 감싸 두드리며 힘내라고 했던 일들이 생각났다.


부친에 대한 추억은 망한 사업으로 인한 가계의 궁핍과 처자식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일들에 대한 회한으로 떠밀린다. 아들이면서 아들 노릇도 제대로 못했구나라는 죄스러움.

동지를 앞두고 겨울비는 이렇게 추적추적 내리는데 이젠 '또 봐요'라는 말도 건넬 수 없다.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알지만, 참 쓸쓸하고 슬프다.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다 자꾸 울컥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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