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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를 심다

매실 매개

by 노월

더 나은 조건이나 더 많은 노력에 대한 아쉬움은 그때 그랬더라면 이거나 만약 그렇다면 하는 가정하의 희망이다. 다시 이 일을 한다 해도, 이 상황을 다시 맞닥뜨린다 해도 이렇게 하는 정도로 밖에 없다는 정도의 인정이다.


아파트 단지 내의 한편에 매화나무가 몇 그루가 있는데 엄마는 매화꽃이 아니라 매실이 탐났던가 보다. 아파트 경비실과 관리실에 가서 단지 내에 있는 매실이 익으면 따도 되는지 물어본다. 주민 누구든 따가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답을 듣는다. 수확을 해도 되는지 여부의 확답을 듣고 싶었던가 보다.


매화꽃이 지고 보일 듯 말듯한 새끼 매실이 열리고 왕구슬 크기로 익기까지 틈틈이 매실을 보러 간다. 제법 굵어진 매실을 확인한 엄마는 내일로 날을 잡는다. 집으로 와서 매실을 담을 적당한 봉지를 찾아 문 앞에 두고, 내심 매실 장아찌를 담글 단지도 미리 씻어 엎어서 말린다.


다음날은 날씨가 흐리다. 누가 볼까 아침 일찍 매실을 따러 나섰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탐스럽게 나무 한가득 주렁주렁 열린 매실을 분명 확인해 뒀는데, 매화나무에 매실이 텅 비었다. 아직 덜 여문 몇 알만 달려있다. 빈 나무에 눈을 의심하다 빈 봉지만 들고 오는데 빈손이 무겁다. 아, 나만 그 매실을 눈여겨본 게 아니었구나.


어느 해는 잽싸게 손을 뻗은 덕에 반소쿠리정도 얻었단다. 그 말을 흘려들었다. 아니 못 들은 척했다. 그냥 매실을 사도 될 텐데 싶기도 했고, 그렇다고 내가 엄마의 그 일에 동참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놓고도 나는 엄마가 담근 아싹하고 상큼한 매실장아찌를 잘도 먹었던가보다.


매화나무를 한 그루 심을까 고민해 본다. 여든 넘은 엄마를 위해 매화나무를 심는 게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매년 꽃 필 매화를 보며 엄마를 기다릴까 봐, 매실을 따며 그 새콤한 맛에 엄마 손맛을 떠올리며 가슴에 남을까 봐 선뜻 손이 안 가는 것이다. 그저 문득 하늘을 보며 한 번씩 엄마는 그랬었지로 만족하며 점점 잊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다.


왜 나는 겨우 나무 한그루 심는 일에 마음을 쓰는 걸까. 홍시 때문이다. 아버지는 홍시를 유독 좋아했다. 빨갛게 농익다 못해 흐물거릴 정도가 되면 반으로 쪼개 단물이 손등을 타고 흐르기 전에 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씨앗을 뱉으며 참 맛있다고 하신 모습이 떠오른다. 학교에서 조홍시가를 읽고서도 그렇고 홍시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떠오른다. 돌아가신 지 한참인데 홍시만 보면.


매화 예찬이 아니다. 사람은 그 사람을 기억하는 동안은 살아있음을. 매화를 매개로 추억이 깊어질까 주저하는 나는 그래도 매화나무를 심었다. 꽃이 좋은 거고, 열매는 덤이다. 직접 열매를 딸 나무를 심는 것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단순하게 보자. 매화꽃이 예쁘지 않나. 나는 매화꽃이 좋아서 매화나무를 심는 거다.


스스로의 한계치를 인정할 때 미련이 없어진다.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는 것으로 족하다. 사후의 연장까지 생각을 늘려 염려할 필요가 없다. 기우다. 나무를 심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사람을 기억하게 되면 떠오르는 그대로 두는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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