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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라 낮술

손이 바빠야

by 노월

춘삼월 들어도 춥다. 낮에 기온이 좀 오르는가 싶더니 봄 눈이 봄비로 이틀째다. 핀 매화는 무던하고, 밭에 심을 감자며 열무 씨앗을 사놓은 엄마는 밭으로 갈 마음을 접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며 전화다.

오늘은 비가 와서 안 되겠지? 다음 주에 가자. 좀 늦게 심으면 좀 늦게 걷지 뭐. 그래도 된다.


뭔가 아쉬워하는 엄마의 목소리에 하늘이 하는 일을 어쩌냐고 말해놓고도 손이 약간 오그라든다. 조그만 밭에 여기는 뭘 심고 저긴 뭘 심고. 이리저리 혼자서 몇 날 째 심었다 뽑았다를 하며 밭 갈 날 기다려왔는데 하필 하늘이 그렇단다.


최근 커피 찌꺼기 경쟁이다. 빠듯한 불경기에 속 타는 마음을 태운 콩으로 각성 삼으려는지 카페가 늘고, 커피 찌꺼기도 많이 나오는데, 카페 문 앞에 커피 찌꺼기 봉투는 내놓자마자 없어진다. 작물에 좋고 해충을 쫓는다는 소문에 텃밭 가진 이들이나 화분 많은 이들이 찌꺼기가 필요해졌는지, 유모차 몰고 운동 삼아 동네를 배회하며 횡득하려던 엄마는 매번 허탕이라고 빈손 소리다.


집 근처 치킨집 사장이 이 말 듣고 옆 카페 가게에서 얻어주겠노라 한다. 그러지 마시라고, 그냥 재미 삼아 엄마 호미 드는 일이니 괜찮다고, 일하시기도 바쁜데 무슨 그런 일까지 부탁할 일이냐며, 아니라고 했는데 한 두 번씩 찌꺼기를 모아 엄마 집 앞에 둔다. 그만 둘 줄 알았는데 벌써 몇 번째다.


니 치킨 좋아하제? 오늘 비도 오고 닭 한 마리 먹을까?

밭에 못 간 탓일까. 땡땡이친 김에 낮술 한 잔 걸치자는 걸까? 여든 중순인 나이에도 한 번씩 나를 유혹하는 엄마는 나보다 더 술을 잘 마시는 것 같다. 젊어 한 때 제비들 설치고 살짝 춤바람 났을 때부터 조금씩 술을 입에 댔다. 국민학교 다니던 내게 막걸리에 설탕 타서 한잔 쭉 마시면 그렇게 술술 넘어간다고 내게도 먹어보라고 잔을 내밀던 그때, 아버지의 손찌검으로 바람은 멈췄지만, 술 생각은 없어지지 않았던가 보다. 나이 들어 술이 더 늘었는지 소주 한 병을 따면 나랑 석 잔씩 나눠 비운다.


작년 형이 엄마와 내게 준다고 가져온 양주를 한 달도 안돼 엄마는 비웠다. 나는 아직 개봉하지도 않은 술을. 노란 술이 좋긴 하더라는 말로. 그래 이 참에 그걸 나도 따야겠다 마음먹고 치킨을 들고 엄마 집으로 갔다.


치킨에 나물무침을 곁들여 펼쳐놓은 술상에 위스키를 작은 잔에 따른다. 아들이랑 먹으니 좋단다. 이 나이에 내일 죽어도 나는 여한이 없다며. 술 많이 먹으면 속 버린다는 말에 '내 니 아니면 잘 안 먹는다'라고 말하는 엄마에게 그럼 형이 준 양주는 그럼 뭐냐는 말에 딴청이다.


그렇게 잘 나가던 오빠가, 내 월세 없어 돈 오십만 원 빌려달라고 찾아갔던 오빠집에서 돈 얘기 할 거면 다시는 여기 발 들이지 말라는 말이, 오십 년 가까이 지났어도 그 섭섭함이 잊히지 않는 날에, 몇 해전 올케가 풍 걸려 집 밖을 나서지 못한다는 말로, 얼마 전 막내 여동생이 내가 보는 앞에서 제부 저 인간 언제 죽냐고 구박하는 소리가, 형제라고 다 같은 형제 아니더라로 외가 친척들에 넋두리다.


이백일호집 노인, 니도 알제? 내캉 동갑 아니었나. 그 집 딸이 반찬가게 하는데 늙은이가 늘상 콩나물이며 고사리며 시래기를 집에서 다듬어 딸에게 갖다 주곤 했거든. 근데 그 이백일호가 허리 수술하고는 딸이 엄마 고생시킨다며 가게 일거리를 더 이상 안주더라는 거라. 그 길로 사람이 좀 힘없어 보여. 그렇게 몇 달 지나 치매도 오고 하더니 마 안 갔나.


내 들어라고 하는 소린지, 그냥 그렇더라는 말인지, 사람이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지, 손길이 필요할 때까지가 존재의 가치라는 말인지, 아직 밖에는 비가 온다. 위스키 세 잔에 얼룩덜룩한 나는 쨍쨍한 할매 목소리가 붕붕거린다.


낮술 먹으면 뭐라고 하던데, 누굴 몰라본다고 하던데, 땅이 젖어 축축한 얘기 끝에 엄마는 우산을 챙겨주며 한마디 얹는다. 이 나이에 아들과 한 잔 하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며 나를 껴안는다. 우리 엄마 낮술 했구먼. 모레까지 비가 온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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