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하고 무료하게 참한
딸의 손을 잡고 들어온 그녀는 별 말없이 앉았다. 다소곳한 모습인데 달리 보면 무관심한듯하다.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딸의 권유 또는 회유로 왔어도, 강압은 아니지만 자발적인 것도 끌려온 것도 아닌, 썩 내켜하지 않는 표정이다. 이런 경우 요모조모 재고 따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듯 살피고, 툭 던지듯 몇 마디 물어보고, 그럼 그렇지 내 생각과 다르지 않군 하는 짐작으로 판단을 내려버린다. 세상의 중심에 본인이 있고, 주변은 본인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인 게 익숙하는 듯이. 그렇다고 본인이 주도하는 것도 아니다. 밀려온 듯이 떠맡기듯이 보여도 심사가 뒤틀리면 금방 낯빛이 변한다.
어떻게 오셨는지 어떤 게 불편하지 뭘 원하는지 물어도 단답형이다. 마음의 방향이 정해지고, 이내 내 쪽에서도 생각을 접는다. 요리조리 간을 보고 있으니 머물기보다 그냥 스쳐 지나갈 사람이구나 싶다. 뭔가 심드렁하고 이리저리 찔러봐도 반응이 무디고 무관심한 쪽이면 애를 써서 뭘 해도 힘만 빠진다. 서로가 원하는 게 다른 것이다. 그러면 너무 잡으려 말고 물러나야 함을.
이거 낫나?
이쯤이면 그녀에겐 판단이 끝난 거다. 마지막 미끼를 던지듯 묻는 말이려니. 여기저기 다녀봤고, 무슨 좋다는 갖은 방법으로도 쉽지 않음을 본인이 더 잘 아는 경우다. 안 낫죠. 내게서 안된다는 말을 듣는 게 의외의 반응이라는 듯 그녀의 주름진 입술에 힘이 더 들어간다. 그 봐라 너도 별 수 없지라는 표정이 확 퍼진다. 그래도 덜하게는 될 수 있어 보입니다. 혹 낫는다는 정도가 생생하게 되는 것이라면 그건 힘들지요. 아니 안되죠. 아픈 게 덜해지고 편하게는 될 수 있어도 젊어지긴 어렵지 않을까요? 살살 달래 가며 조금씩 덜해지게 어느 정도. 완전 안 아프게는 어렵습니다.
덜해지게는 된다고? 그것도 나쁘진 않네.
나만 믿으면 좋아진다, 이렇게 하면 확실히 낫는다라는 말을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들었을까. 그런 이들의 말이나 방법을 따라 하면 당장 어찌 될 것처럼 권해서 막상 해봐도 잠시 그럴듯하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통증이 밀려왔다. 그런 기대와 실망의 반복으로 낙심하고 속았다는 괴심함이 불신을 낳았다. 이젠 그냥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보다 포기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던 중에 딸의 성화로 못 이기는 척 여기로 왔다. 그녀에겐 나 또한 비슷한 인간이라 생각되지 않았을까. 똑 부러지게 된다는 말이 아닌, 덜 아픈 정도의 가능성으로 하는 말이 그나마 좀 솔직하게 들렸을까.
첫마디부터 난 까다롭소이다라고 먼저 포고한다. 햐 참, 일단 얘기부터 들어보자고 했다. 나열한 증상들이 특별하다기보다 연세에 따른 신체 변화를 수용하기 힘들어하는 느낌이다. 이럴 경우엔 스스로 인정하길 기다리고, 그걸 받아들일 여유를 가지고 소통하려 노력해보려 한다. 자각. 뭔가 특별하고 엄청난 것이 발목을 잡는 게 아니다. 일상의 사소한 불편함들의 껄끄럽고 답답함이 몸을 지치고 힘들게 한다.
며칠을 왔다. 그런 어느 날. 뽀얀 세모시 저고리 옷을 각 세워 달여 입고 왔다. 여름에 이보다 시원한 옷은 없노라 했지만 그런 옷을 입을 요량이면 빨고 삶고 풀 먹이고 달이는 품을 생각만 해도 번거롭고, 활동에 제한이 많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닐 텐데 학처럼 앉았다. 허수아비처럼 가만있지 않는 한 조금의 활동에도 옷은 구김지고 주름 잡혀 다시 달여야 하는 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닐 텐데 그 나이에 그렇게 새하얀 저고리를 시원하게 입었다.
몸은 좀 어때요?
그게 벌써 낫나, 그래도 좀 잤다. 대답이 짧지만 이정도면 괜찮은 평가다. 그래서 곱게 차려입고 오셨나 보다. 까탈스럽고 고집스러운 면이 있지만, 그걸 따지기보다 충분히 그럴 수 있음을 받아들이면 서로 편해진다. 그렇게 통하는 순간 이미 치료는 끝난 거다. 소소한 해소점을 찾아 풀어줄고, 또 관리나 예방법을 일러주어 집에서 하도록 숙제를 낸다. 치료는 결국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 하고 부르니 문득 나무란다.
할머니라 부르지 마라. 나이 많은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그렇게까지 불리는 건 더 싫다.
그럼, 뭐라고 해요?
아줌마라고 해라.
엄마 나이의 여성. 아주머니란 말도 아주 엇난 호칭은 아니지만 할머니나 아주머니나 특정 대상이 아닌 점에는 비슷하거늘 젊게 불리길 원하나 보다.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재미 삼아 '풍자언니'라 부르겠다고 했더니, 언니란 말이 또 잠시 생뚱맞은가 보다. 누나라고 하기엔 또 뭣하다. 풍자언니. 입에 착 달라붙게 부르기도 쉽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네. 그렇게 나는 풍자언니로 부르고, 그는 응 하고 답한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호칭이 정해지면 그 사람과의 거리도 관계도 정해진다.
언니라는 불림에 기분이 좋았을까? 갑자기 말이 쉬워지고 속내 얘기들이 슬슬 나온다. 위로 오빠, 아래로 남동생만 있는 집안에서 홍일점으로 자랐으며, 큰 부자는 아니지만 못 사는 형편은 아니었거든. 딸이 어떻고 아들이 어떻고.
호불호가 뚜렷하다. 보통의 나이 든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배려차원에서 애매하게 동의하는 모양새로 '뭐 그런 정도면 좋고'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하는 게 일반인데, 풍자 언니는 '그건 좋다, 저건 싫다'라고 색깔을 분명히 한다. 깐깐해 보이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그런 면이 더 일을 쉽게 풀어낸다.
낯선 음식에는 여지없이 배탈이 날 정도의 까탈스러운 예민한 소화력을 본인도 늘 인지하고 있지만, 경로당 같은 경우에서 어쩔 수 없이 수저질을 해야 하는 경우엔 거절하지 못해 예의상 한 술 떠먹으면 그날 저녁엔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밤새 복통으로 고생했노라는 호소에 복진을 해보면 배꼽 주변의 싸늘한 냉기와 압통. 분위기가 그랬는가 보네요 하고 물었더니, 그게 한 술 안 떨 수가 있어야지, 또 탈이 나겠구나 알아도 그런 경우가 있어.
호와 불호 사이의 많은 시간들에 자꾸 지겹다고, 지겨워 이것도 심드렁 저것도 심드렁. 이 나이에 뭘 배우는 것도 힘들고, 책은 눈이 침침하고 아른거려 못 보겠고, 그렇다고 노인정에서 화투치기도 그렇고, 같이 어울리는 것도 성미에 안 맞고. 맑은 목소리다. 풍자언니는 그래도 노래는 잘하지 않냐는 말에 그건 쫌 한단다. 춤추면 더 좋고 했더니 춤은 안된단다. 밤새 티브이 틀어놓고 자다 깨다 새벽녘에 날이 밝아오면 그제사 설핏 잠에 빠져들고.
우산 장수와 신발 장수 얘기처럼 자식들 보면 큰 놈은 공사판 돌아다니느라 새까맣게 타서 걱정되고, 작은놈은 아직 짝 없이 지내서 걱정되고. 영감이 암으로 오랜 병원생활 탓에 고생시키더니, 가고 나면 속 시원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잠시더라. 밤에 혼자 있는 것도 무섭고, 천둥 번개도 무섭고. 그런 말들을 듣다 보면 참 귀엽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 든 이들이 어떤 땐 아이처럼 보이기도 하니.
예민하고 까다로워도 그 속내와 고충이 가끔은 이해 가기도 한다. 그냥 그대로 좋으니. 성격, 바꿀 수도 바꿀 필요도 없으나 풍자언니 그래도 부탁인데 어쨌든 걸으려 하고, 밥 잘 챙겨 드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