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힘
이틀째 정호의 엄마는 말이 없다. 분명 야단을 치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어야 정상인데, 몽둥이는커녕 왜 그랬는지 묻지도 않는다. 어제 오후에 그 일이 있고 나서도, 그날 밤에도, 오늘까지도 아무런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그런 엄마의 침묵이 정호에게는 더 두렵다.
심부름 보냈다가 시킨 일을 까맣게 잊고 저녁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에 들어와서는 돈을 잃어버렸다고(두부 사 오라 시켰는데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아 엄마가 두부 사러 갔다가 사탕을 입에 물고 오락실에서 정신없어하는 아들을 봤는데도) 거짓말했을 때, 야구하다 옆집 창문을 깨거나, 동생을 때리거나, 싸웠는지 옷에 흙이 잔뜩 묻어오는 때는 언제든 엄마의 잔소리와 회초리가 날아다녔다.
그런 엄마가 어제의 일에 대해선 아무 말이 없다. 아무 일이 없었던 듯이 일상적이다. 일이 있을 때마다 늘 반복되던 일들이 이유 없이 일어나지 않고 건너뛸 때가 더 마음을 졸이게 한다. 한 대 맞고 나면 끝날 일인데 아무 일 없이 넘어가면, 이게 아닌데 이건 뭔가 정상이 아닌데, 도대체 얼마나 모았다 일을 터뜨리려는 건가, 쓸데없이 괜히 엄마 눈치를 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아, 이렇게 끝날 일이 아닌데 이렇게 끝나려나? 기분이 게운치 않게 며칠이 간다.
그 일은 사실 정호 단독의 일이 아니었다. 축구를 좋아하던 정호가 축구부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은 때다. 얼마나 신나고 재밌었는지 새벽마다 일어나 혼자 공을 차고, 같은 축구부에 들어온 친구와 짝을 이뤄 공놀이를 했다. 다른 동급생은 물론이고 차츰 선배들을 알아가던 무렵이다. 학교에 갈 이유가 분명해졌다. 아니 학교를 안 갈 수가 없었다. 정호는 좀 더 잘하게 위해 연습하고 선배들 축구 모습을 보며 머릿속으로 드리블을 하고 슛을 한다.
그 축구부에 동네 선배도 같이 있어 집에 올 때 한두 번 같이 오기도 했었다. 어느 날 그 선배가 정호를 부른다. 옆엔 축구부원으로 얼굴만 알던 다른 선배들이 팔짱을 끼고 함께 서있었다. 정호 너 저 집에 가서 과일 좀 가져와라. 예? 주인아줌마 조는 거 안 보여? 아, 예.
과일가게 아줌마는 의자에 앉아 졸고 있고, 정호가 가까이 다가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슬금슬금 정호는 굵직한 사과 두 알을 주머니에 각각 넣고, 한 손에 한 개씩 사과를 들었다. 그리고 뛴다. 순간 뒤에서 가게 형이 정호의 뒷목을 잡아챈다. 망을 보던 선배형들은 이미 튀었다. 그 길로 불룩한 주머니와 양손에 사과를 든 체 정호네 집으로 간다. 아줌마의 현장 설명과 그전에도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는 올가미까지 엄마 앞에서 장황설이다. 콩나물 다듬던 엄마의 단 한마디. 얼마요?
첫 거짓말을 한 순간, 다음 말도 거짓으로 덮으며 처음 쏟은 말을 공고히 한다. 상대의 미심쩍어하는 눈치를 피하고, 이어지는 확답을 요구하는 물음에 거짓말이 거짓인 줄 알아도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뱉어버린 스스로의 말을 번복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자기부정을 인정하기가 두렵다.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밀어붙인다. 이미 강을 건너버렸다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을 굳힌다. 그리고 오래오래 불쾌하고 불안한 마음을 달고 산다. 그렇게 익숙해진다.
엄마의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사건을 그렇게 마무리 지으면서 정호의 속이는 말이나 도둑질이 더 커질 가능성이 떨어져 나간다.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기억. 어려서의 일이었지만 정호는 사과를 볼 때면 한 번씩 눈치를 본다. 엄마의 침묵은 얄팍한 이해득실에 잔머리가 돌아갈 때마다 잡초를 누르는 돌이 되고, 인생에 잘못을 회피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산 꼭대기를 누르는 바위가 된다. 그냥 한 대 맞고 치울 일이 그렇게 무겁게 오래도록 짓누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