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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un 10. 2022

한없이 함 없는 1

큰 소리는 들을 수 없는 울림만 남고

무달 형님은 앉자마자 탁자 위에 검은색 하드카바로 된 책을 한 권 놓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천천히 운을 뗀다.


이 책을 우리가 볼 수 있게 된 과정을 보면, 참 인연이란 게 뭔지? 지금까지의 자취들이 쌓이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 귀한 책이 우리에게 주어졌을까 싶네. 무달형님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선생님과 10여 년을 같이 한 자취를 더듬는다. 그때는 나도 젊었었지.


선생님 당시엔 일제 식민지배의 시대상황이라 모두 힘들고 어렵고 배고픈 시절이었네. 어릴 때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던 선생님은 생존을 위해선 한의학을 배워야겠다고 마음 먹으셨네. 정해진 교제가 따로 없었고, 가르침을 받을 곳도 마땅치 않았는데, 마침 떠도는 소문에 큰 도시의 어느 대감집에 가면 된다고 들었지. 가난하여 그 대감집에 들어가는 대신 무상으로 소작을 해주고 숙식을 제공받기로 한 거지. 그 대감도 유학자 집안으로 나름 유명했는데, 그 집에 가끔 들르는 어떤 분이 한의학 원리를 펼치는 대단한 분이라는 걸 듣고 그분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서 였다지 아마. 그 집 대감이 한번은 크게 병이 났는데 그 분의 도움으로 치료가 되고 나서는 깊이 사귀게 되었고, 그후로 대감도 의학을 배워 유의로서 나름 실력자였나봐.  가끔씩 들르는 그분과 대감이 담화도 나누고 시국 정서도 교환하고 나면, 선생님 짬을 내어 기다렸다가 그분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 달에 두어 번씩 들르는 그분에게서 선생님을 깊은 감명을 받으셨나 봐.


그분도 선생님의 총기를 알아보곤 대감집에 들를 때마다 선생님을 찾았. 한 번은 그분이 선생님에게 봄을 얘기했는데, 잠깐 나눈 대화에서 선생님은 여름, 가을, 겨울도 그렇겠네요 했더니, 그분이 아주 흐뭇해하며 그렇지 그렇지 그렇게 다른 것들도 유추하면 확실히 넓어질 거라고 좋아셨어.


점점 실력이 쌓이면서 선생님은 내심 그분을 스승으로 모시려고 했. 스승 또한 선생님의 능력을 눈여겨보고 있었는지 이것저것 많이 일러주려고 하셨는가 봐. 그러나 대감은 그러한 선생님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지도 몰라. 대감 입장에서는 그의 자제들 그 분과 사귀게 되길 바랐지만, 교제가 잘 이뤄지진 않았거든. 부잣집에서 태어나 자란 자식들이 그런 학문에 대한 관심 가지지 않고, 간절함도 그리 크지 않았을테니. 그런 상황을 선생님 혼자서도 묵묵히 해내고 있었으니, 더구나 종살이로 들어온 놈이 제법이라는 생각에 더 밉지 않았겠나. 대감이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말이지.


한 번은 한 겨울인데 나무가 부족하다기도 해서 방에 궁불조차 때지 못했는데, 그때는 참 혹독히도 추웠나 봐. 선생님은 방석을 8개나 깔고 그 자리 위에 앉아 잠을 청하셨다더군. 누우면 냉기바닥에서 올라와 도저히 잠 들 수도 없었거니와 그러다간 동사하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고 하더군. 방석 위에서 그래도 나름 운기조식을 배운 터라 그걸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때의 정신력으로는 어떻게 하든 공부를 마쳐 나름의 방향을 정하고 싶었던 거지. 그렇게 한 겨울을 보내고도 큰 병치례 없이 지내며, 실력까지 일취월장하는 선생님을 보고 대감도 어느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때 동네의 어떤 노인이 몇 달을 소변을 못 봐서 힘들어 대감에게 약 처방을 받아가서 몇 제를 달여 먹어도 효과가 크지 않았어. 그래서 대감은 시험 삼에 선생님에게 처방을 써보라고 했다나. 선생님은 그전에 대감의 처방을 보여줘야 그에 맞춰 다음 처방을 쓸 수 있으니, 먼저 대감의 처방전을 보여 달라고 청했지.  대감은 네 깟놈이라는 심정으로 처방을 보여줬는데, 그 처방은 육미지황탕 위주의 음정을 보하는 처방이었나 봐. 선생님은 인삼을 군약으로 하는 처방을 제시하고, 노인은 그 처방전을 들고 약방에 가서 몇 첩 지어고 나아버렸지. 그래서 대감은 선생님에게 노인이면 응당 육미지황탕을 기본으로 해야 하는데 왜 처방을 그리 냈냐고 물어서, 선생님은 노인 음정이 부족한 건 사실이나, 그 노인에겐 일단 기운 부족이 더 우선이라 그리 했다고 설명했네.


그릇의 크기라는 게 정해진 건 아니만,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새까만 후배를 마냥 귀여워해 줄 만큼의 그릇은 정작 본인도 나름 나도 난데 하는 입장에서는 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그러나 뒷물이 앞물을 밀지 않으면 강물은 흘러갈 수가 없다네. 담벗. 자네도 얼른 더 커서 나를 밀어주길 바래. 그게 나를 돕는 거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극이 되어 커가는 과정이 되면 좋지 않겠나.


여하튼, 몇몇 유사한 경우가 발생한 이후로 대감은 그만하면 이젠 뭐 흠흠하며 슬며시 고개를 돌리더라는 거야. 그래도 그 대감 또한 동네의 큰 재력가이기도 하고, 나름의 실력자로 인정받는 분이었는데도 그런 마음이 들었나봐. 그 쯤 선생님도 떠날 때가 됐다고 생각을 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스승님을 한 번 뵙고 싶었는데. 대감은 은근 떠미는 모양이었던 거지. 그래도 참 연이란 게 있어선지 스승에게도 그간 소식이 들어갔나 봐. 스승님은 선생님께 기별을 넣어 그렇게 마지막 점검이 이뤄지고, 스승은 대감에게 선생님을 잘 부탁한다는 말씀을 덧붙였다네.


선생님은 마침내 스승으로부터 인가를 받았던 게지. 처음엔 스승도 선생님을 거들떠보기나 했겠나 마는 시골 출신의 젊은이가, 본인이 스치듯 이른 내용을 다음 만남에서는 곱씹어 의미를 파악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끔 스승이 생각 못한 부분까지 언급함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셨지. 그렇게 스승으로부터 받은 배움을 실제 임상에서 적용해보고 확인하면서 점점 자신감이 생겨났다 하시더군. 해방 후 국가고시를 치르고 정식 한의사 면허를 취득하기까지.


나중에 선생님은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서 대감을 찾아가 고마움을 전하고 화해하지 못한 걸 후회한다고 하셨어. 눈칫밥이라는 게, 주는 사람은 별 아닌 거라 무심 일지 몰라도, 받는 입장에서는 꼭 말로 표현이 아니라고 해도 하다못해 발걸음 소리에서도 섭섭함과 부끄러움이 느껴지는 법이거든. 그래도 선생님은 마음의 빚이요, 힘든 상황에서 받아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을 전했어야 하는데 못한 걸 안타까워하셨지.


고향으로 돌아와 한의원 문을 열었지만, 마을 사람들에겐 아직 어렸을 때의 선생님으로 기억이 남아 있기도 했고, 실력을 알 수도 없었으니, 선생님에게 쉽게 몸을 의탁했겠나? 그래도 기본 원리에 충실한 치료가 나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지. 한 번은 동네 어린애들 여럿이 동시에 소아마비가 걸렸나 봐. 영양이 부족한 상태에서 여름 폭염에 시달리다 가을 찬바람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만 팔다리 마비되어버렸어. 그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는 대부분 병원을 갈 형편이 안되기도 했고, 갈 마땅한 병원도 잘 없었지. 그때 선생님께 부탁하여 처방받은 애들이 나중에 정상으로 돌아왔어. 순식간에 선생님의 명성이 자자해졌고. 나중에 우리에게 공부를 가르치면서 선생님은 그때의 병리로  하말추초夏末秋初에 한습으로 인해 몸의 기운이 엄습을 당하면 그런 마비가 올 수도 있음을 설명해주시더군.


한방 진료를 통해 명의로 알려지고, 원리에 기초한 한의학적 임상 가치를 더욱 확신하던 어느 날. 선생님은 스승이 전해 준 책에 지금까지의 역대 의가들의 대표 처방과 스승의 임상례와 선생님이 직접 겪은 경험방을 정리하기 시작했어. 그게 스승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고, 다음 세대를 위한 필요성이었지만, 내심 선생님의 둘째 아들을 염두에 두고 책을 쓰신 게 아닐까 싶기도 했네. 아마 장남보다는 둘째가 더 총명했던 모양이야.


담벗 함 생각해보게. 아끼는 제자를 위해 책을 쓴대도 애를 많이 써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인데, 그 대상이 아들이라면 얼마나 정성을 들여 책을 썼겠나? 숱한 편집을 가하며 마침내 끝낸 책. 덧붙여  전하고 싶은, 글로 전할 수 없는 부분까지 어떻게 전달할까를 생각하며 아들에게 한의학을 권했지. 그것으로 선생님은 스승의 학맥이 이어지도록 하는 게 스승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야.


치료를 할 때 선생님을 많은 환자를 보려고 하진 않으셨어. 환자가 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병리를 설명하고, 그 병의 발생 과정 환자가 그렇구나라고 스스로 느끼면 병의 반은 나았다고 볼 수 있다고 하셨어. 그런 선생님의 치료 방법이 지금의 내게도 이어지고 있지.


나도 안다. 무달형님의 치료 상담시간에 이미 이뤄지고 있음을. 그래서 무달 형님의 아들이 한의대를 안 간 것도 그게 일부분 작용했음을. 밤새 처방 고민하고, 환자 치료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돌려보내고, 매일 경전을 읽고 마음을 다잡는 모습을 보며 자란 무달형님의 아들은 그만 질려버렸다는 것을. 모든 한의사들이 그런 건 아닐 텐데 그 아들은 그렇게 생각했나 보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책을 들고 있어야 하는 직업으로서 한의사는 매력적이지 않다고.


담벗. 그런데 말이지. 참 세상은 생각대로 되질 않나 봐. 다시 무달 형님은 밖을 내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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