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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Aug 01. 2022

미숙 성인

선택의 권한

잘 나가던 살림이 하루아침에 몰락했다. 사업을 하는 이들의 속성상 사업체의 경영 환경에 따라 수입의 부침이 뚜렷하고, 그에 따라 가족들의 생계도 밀접하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려서 누렸던 여유로움이 순식간에 생활고까지 걱정해야 하는 궁핍으로 바뀌는 건 금방이지만, 상황에 맞게 사람이 적응하기는 쉽지 않은 지난한 수용의 과정을 어쩔 수 없이 인내해야 하고, 그 속에서의 좌절도 사람을 더욱 위축시킨다. 사춘기에 있는 이들에겐 평생의 기억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조카의 어릴 적 생활은 그런 과정을 고스란히 몸으로 느끼며 자랐다. 더구나 사업상 부도임에도 사기죄로 여러 차례 구속된 부친과 그로 인한 부모의 이혼. 결국 남겨진 홀어머니의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보며 자랐기에 막상 본인의 사춘기 성장통은 자연스레 묻히고 말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그는 결코 그의 장래에 대한 꿈을 모친에게 시원스레 얘기한 적이 없었다. 본인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푸념하기엔 밤마다 귀가하자마자 코 골고 잠자기 바쁜 엄마에게 차마 말 못 할 사소함이요, 한가한 사치처럼 느껴졌으리라. 키 크고 하얀 피부에 섬세하기까지 한 내성적 성격을 더 고립하게끔 환경이 조성됐다.  


조카가 직접 내게 연락을 취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가끔 누나에게서 그에 관해 건네 들을 때면 사춘기의 왜곡이 그를 엇나게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본인의 생각이나 의지를 내세운 적 없었기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할 때도 그의 모친 의견을 따랐으리라 생각된다. 의료계통으로 진출해야 경제적으로 자유롭다는 누나의 생각은 고스란히 조카를 의료 관련 학과로 입학하게끔 했을 듯하다. 그러나 의료 관련 학과라고 해도 흔히 말하는 '~사'자를 달지 않는 한, 그 바람은 요원하다.


힘들어할 그를 위해 손편지를 보낸 적 있다. 아마 내용은 자기를 돌아보고, 뭘 하든 스스로 결정하고, 자립을 위해 노력해서 당당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인격체이길 바란다는. 어찌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먼 나라 얘기였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정말 그가 본인의 삶을 살길 바랐다. 주눅 든 그가, 홀어미 고생을 곁에서 보고 자랐기에 잘해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을 테고, 더구나 모친의 억센 성격까지 더하여, 결국 모든 결정권을 그의 엄마에게 맡기는 상황이 걱정됐다.


애당초 공부를 못했으면 처음부터 다른 길을 찾았을 수도 있으련만, 나름 공부를 잘하는 게 장점 아닌 단점으로 작용했으니, 아예 탁월한 능력이면 몰라도 그럭저럭 제법이네 하는 정도의 실력은 마치 계륵처럼 갈등을 일으킨다. 더구나 뭘 할 것이라는 방향성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성적에 맞춰 그럭저럭 간판 좋은 선택지를 정할 터. 그의 결정인지 아님 그 엄마의 결정인지는 몰라도 가난을 끊고자 하는 수단으로의 '~사'자 로망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어려운 형편에 재수를 강행하여 전과를 하고 다시 반수를 하여 마침내 약대로 편입한다. 그의 20대는 그렇게 몇 개의 대학과 학과를 옮겨 다니며 입시 과정만 계속 반복하는 과정으로 아까운 시간들을 흘려보냈다. 그게 그의 의지였을 런지 아님 모친의 의도였는지는 몰라도.


하다못해 이렇게 미뤄진 대학 진학으로 급하게 서둔 군입대 또한 그의 모친의 바람을 따랐다. 어떤 부대를 갈지, 언제 입대를 할지를 그는 모친의 권유에 따라 이의 없이 승낙했다. 어쩌면 한 인간으로서 거쳐야 하는 중요한 선택을 그는 어떠한 결정권도 행사하지 않았고, 그 모든 것을 훌륭하게 해 낸 모친은 더욱 자신감을 가지게 된다. 지금까지 나름 괜찮은 선택을 한 모친은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나마 만회하고 싶었겠다. 본인 나름의 요령과 경험으로 세상 이렇게  헤쳐나가거라는 확신으로.


그 쯤 누나는 조카에게 혹 결혼한다면이란 전제를 깔긴 했지만, 예비 며느리로서의 조건을 이른다. 정말 의미 없고 쓸데없는 간섭이라고 했지만, 아마도 그녀는 조카에게 본인의 컷오프 기준을 얘기했으리라. 대충 들어보면 애완견 키우는 이, 예능 관련 학과 출신, 크리스천, 이대 출신 등등. 아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녀의 살아온 경험치에 바탕을 둔 생각들이겠지만, 조카에게 말할 부분은 아니지 않나? 이제 약사까지 되어 대형 약국에서 근무하고 있고, 나중 약국을 개국하게 될 아들에게 그녀의 조건은 아마 더 까다로워지리라.


결과론적 얘기지만 조카는 몇 년을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그 여자 친구는 조카를 좋아했지만, 너무 완벽을 추구하는 조카를 부담스러워했다. 조카에게 너는 왜 그녀랑 헤어졌냐고 물었는데, 그는 대답 대신 일그러진 표정으로 씩 웃으며 '그냥' 이란다. 게운치 않다.


상상을 해본다. 만약 그가 결혼을 한다면 그의 모친은 그렇게 힘들게 가꾼 작품에 대한 보상을 바라리라.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그러나 조카는 두 여자 사이에서 무척 힘들어할 것 같다. 고생해서 지금까지 키워준 홀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사랑하는 부인 사이의 상충되는 껀 들에  꽤나 갈등을 겪겠다. 결정적 판단의 상황에서 그는 과연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후회 없는 흔들리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관심과 간섭. 꽤나 애정을 갖고 신경을 쓰고 한다지만, 그 선택의 순간에 기회와 시간을 뺏고선 '내가 살아보니 이게 더 옳아'라는 식으로 선점을 해버리면 자체 성장은 힘들다. 정말 사랑한다면 지켜만 보라. 안타깝고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냥 놔두라. 정말 사랑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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