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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Aug 08. 2022

당황증

침착은 평소의 연습

밤늦게까지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일을 끝내야 한다. 속으로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면서 미루다 오늘까지 왔다. 분류를  끝내고 이제 약장 위로 물건을 쌓으면 된다. 높이가 있어 몸을 쭉 뻗어야 맨 위에까지 물건이 채워진다. 마지막으로 이것만 끝내면 된다. 손에 잔뜩 물건을 들고 선반에 올라 선반 가장자리에  발끝으로 디디고 올라섰다. 꼭대기로 물건을 들어 올리는 순간 정신을 잃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을 차렸을 때 내 몸은 찬 바닥에 누워있다. 가능한 한 차분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천천히 숨을 들이마셔보고 내쉬어 본다. 아직은 살아있구나. 눈을 감은채 안구를 좌우로 굴려보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아직 몸을 움직이지는 않고 그대로 누운 자세에서. 눈에 보이는 바닥엔 깨어진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있고, 높이가 1m쯤 되는 선반은 제자리를 벗어나 비껴져 있고, 잡동사니가 쏟아져 있다. 저 선반 위에서 뒤로 넘어졌으니 자칫 어딘가 찢어지거나 부러지진 않았을까? 천천히 손가락과 발가락을 조금씩 꼼지락 거려본다. 움직여진다. 다시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살핀다. 당장 몸에 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온몸이 뻐근하게 아프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목을 돌려보고, 조심스럽게 앉아본다. 등허리에 묵직한 둔통이 느껴진다. 앉아서 몸을 좀 더 움직여 본다. 다행히 골절이나 다른 손상은 없는가 보다.


그런데 새끼손가락이 유독 따갑다. 유리 조각이 손바닥 쪽으로 깊이 박혔다. 조심스레 파편을 빼냄과 동시에 피가 주룩 흐른다. 테이핑을 하고 몸 다른 곳을 살핀다. 서서 조금씩 걸어본다. 팔꿈치와 골반쪽의 욱신거리는 통증 외에는 다행히 괜찮은 듯하다.


예전에 선생님은 당황증을 내지 않도록 그렇게 강조하셨다. 당황하지 말고 차분하게 대처해야 병에 벗어나기 쉽고, 혹 병에 걸리더라도 병이 심해지거나 깊어지지 않게 된다고 여러 번이고 말씀하셨다. 죽을 고비에 처했어도 당황증을 내지 말고 또렷이 본바탕의  천진(天眞)을 잡고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그 말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고, 평소에도 주변을 살피며 잘 놀라지 않도록 준비를 하려고 했다. 이렇게 넘어졌을 때도 당황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어 나를 침착하게 했다.


남자 환자가 내원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산행을 위해 집을 나서서 별 탈 없이 걸어가다 등산로 입구에서 그만 의식을 잃고 응급실에 갔단다. 당뇨병이 있어 저혈당 쇼크의 양상처럼 보였지만, 검사상 별무 이상이었다. 그 후 몇 차례 비슷한 증상이 있어 그때마다 응급실에 가면 매번 똑같은 별무 이상의 진단을 받았을 뿐이었다. 저혈당 쇼크가 아니라면  증상으로 봐서 일과성 뇌허혈이나 일시적 뇌빈혈의 상황 등을 예상할 수 있겠다. 증상을 물어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가다가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기운이 쑥 빠지면서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지고 의식을 잃고 넘어진다는 것이었다. 전조 증상이 있을 듯하여 물어보니 잘 모르겠단다.


분명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 전에 몸에서 이상신호를 알리는 전조 증상이 있을듯했다. 일단은 평소 생활 중에 조금이라도 숨이 가쁘거나, 눈앞이 캄캄해지고 어지러우면, 그 자리에서 바로 앉거나 쉬어야 한다고 일렀다. 걱정하거나 당황하지 말고 우선 하던 활동을 멈추고, 몸을 관찰하듯 멈춰 살펴보길 당부했다. 그렇게 관찰을 해보니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 먼저 가슴 답답한 증상이 나타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이라도 답답하다고 느끼면 일단 멈추고, 심호흡을 하여 몸이 회복되면 다시 움직이라고 했다. 그렇게 전조증상이 나타나면 안정을 취하면서 괜찮아지길 기다리는 과정을 여러 번. 이후 허혈이나 빈혈 같은 증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邪氣之入人也에 邪氣反緩한데 正氣反急하여 正氣引邪라(사기지입인야 사기반완 정기반급 정기인사)'라는 문구가 있다. 외부에서 들어것이든 내부 발생이든 몸에 나쁜 사기(邪氣)가 영향을 끼칠 때, 오히려 정기(正氣)가 당황하여 조급해지면, 병을 더 악화시키게 된다. 적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문에 벌써 내부 동요가 일어나고, 심하면 적의 공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스스로 자멸하게 될 수도 있다. 시야를 좁게 가질수록 더 불안하고 당황하게 된다.


선생님은 말미에 우스갯소리라며 한 얘기가 마음에 남는다. 살면서 아무리 악행을 저지르고 못되게 살아도 죽기 전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열 번을 소리 내어 말하면 천에 간다는 말이 있다며. 에이, 무슨 그런 농담을 하시나 하고 생각하다 의문이 들었다. 꼭 악행이 아니더라도 평소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 죽기 직전에 과연 그렇게 열 번을 읊어야 라는 생각이 들까? 결국 평소 그 연습을 미리 해 두지 않으면 그 급박한 순간에 살려달라고 바둥되지 않으면 다행이. 당황증은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닌 때에 준비를 해둬야 한다. 꼭 천당 지옥이 아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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