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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ul 27. 2022

절대음

동네 무명 가수의 원음 찾기

저녁 무렵. 낯선 동네에서 일을 본 후 짬을 내어 근처 야산을 거닐던 중 멀리서 들리는 떠엉~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멈춘다. 어딘가 절이 있는지 은은한 종소리가 울린다. 처음 타종되는 곳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종소리는 작게 들리다 어느 지점에서는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고, 더 먼 어떤 장소에 이르러 다시 그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소리의 파동, 음파를 생각하다 문득 오래 전의 동네 무명가수가 떠올랐다. 그가 찾던 소리가 어쩌면 이 종소리와 유사하지 않을까 하면서.


한창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세상모르게 살던 20대의 어느 날. 새벽녘에 잠이 든 나는 느지막한 오전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동네 대중목욕탕을 갔다. 이 낡고 좁은 목욕탕에 시설이라고는 벽면을 따라 늘어선 샤워기와 단출하게 몸을 데우는 열탕이 전부였다. 최신 사우나실이나 각종 이벤트탕이 있는 사설 목욕탕보다 훨씬 단순한 내부 인테리어였지만, 무엇보다 집에서 가깝고 값이 샀다. 다들 출근했을 시간의 평일 늦은 오전. 슬리퍼에 대충 껴 입은 운동복 차림으로 느긋하게 목욕탕에 들어갔다. 가끔씩 들르는 이 목욕탕 이 시간쯤이면 거의 손님이 없거나 있어도 한둘이 고작이었다. 탈의를 하고 안경을 벗고 들어갔다. 탕의 열기로 인해 뿌연 수증기가 가득하고 사위 조용했다. 심한 근시 시력 탓도 있었지만 내 숨소리, 발소리만 온전히 들리는 고요한 목욕탕. 역시나 좋구나 이 늦은 오전의 게으른 느긋함. 참 좋다고 생각하며 탕에 몸을 담그다 화들짝 놀랐다. 물도 뜨거웠지만, 벽 쪽 좌식 샤워기 부스에 등을 내보이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앉아있는 게 아닌가. 으악! 하고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냈고, 나체로 대충 다리를 꼬면서 열탕에서 얼른 일어섰다. 죄송하다고, 여탕인 줄 몰랐다고 말하고 밖을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는데 돌아오는 허스키의 목소리. 여기 남탕 맞아요. 어?남자네. 어떻게 까만 머리를 저렇게 곱게 길게 기를 수가 있나?


서로 알몸이라 미안하다는 간단 말로 끊으려다 보니, 같은 동네에 사는 살짝 안면이 있는 형이었다. 항상 머리를 묶고 다니며 큰 키에 마른 체형. 서로 통성명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나보다 두세 살 더 위의 나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기타를 치며 버스킹 공연을 하기도 하고, 레스토랑이나 라이브 카페에서 일하기도 한단다. 서로 존대를 하며 얘기를 했지만, 이렇게 직접 대화를 하긴 처음이었다. 거리 공연에서는 주로 자작곡 노래를 불렀는데, 무슨 읊조리는 듯한 음악이라 발걸음 멈추고 서서 듣는 이는 드물었다. 음학을 한다며. 어디 소속은 없지만 나름 음音에 관심이 많아 연구 중이란다. 정규 교육에서의 과목도 없고 본인이 원하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그래서 음악 아닌 음학을 한다고 본인을 소개한다. 밖을 나와 자판기 커피를 같이 마시다 또 보자며 어깨에 기타를 메고 그는 사라졌다.


누구나 유독 어느 한 가지에 밝은 게 있기 마련이다.


그렇게 헤어진 그를 다시 만난 건 집에서 좀 떨어진 야산의 약수터에서였다. 엄마는 뭘 담글 때 가끔 이 약수터로 나를 보냈다. 잔소리를 몇 차례 듣고서야 산으로 가서 약수 담은 페트병 몇 개를 배낭에 지고 막 내려오던 차에, 산에서 내려오는 그를 만났다. 여전히 긴 생머리를 한 그는 전보다 더 핼쑥하다. 그간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더니, 최근 산속에 자주 머물렀단다. 비닐 텐트에 약간의 양식을 들고 사나흘씩 그렇게 머물다 내려온다고. 지금도 내려오는 길이란다.


문득 그는 내게 묻는다. 지구 도는 소리 들어봤냐고? 멀뚱히 쳐다보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표정이다. 그렇게 산속에 홀로 지내다 보면 깊은 새벽 그 소리가 들린단다. 지구 돌아가는 소리. 가끔은 별빛에서도 소리가 나는데 별빛소리는 좀 더 가볍고 맑은 소리가 찰랑거리듯 길게 들리지만, 지구 도는 소리는 그보다는 좀 더 묵직하게 웅아앙하는 소리란다. 그렇게 음에 더 집중하다 보면 절대 원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단다. 절대음. 그게 뭔지 물었어도 그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다. 음악의 La음에 가까운데 본인 생각에는 La#이 더 맞지 않을까 싶단다.


한 번은 동네 슈퍼에 과자를 사러 갔다가 그를 만났다. 드럼 스틱 같이 생긴 막대기로 바닥을 한참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다 벽이며 주변 사물들이며 닿는 대로 막대기를 들고 탁탁 치면서 소리에 집중한다. 그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소리들이 막상 직접 들어보면 다르단다. 예전 어떤 미대 지망생이 '물감의 색깔이 다르니 맛도 다르다'며 팔레트에 짜인 물감을 손으로 찍어 맛보던 얼치기 모습이 생각났다. 그러다 그는 다시 내게 묻는다. 소리는 밖에서 나는 것도 있지만, 내부에서도 울린다고. 그 내부의 울림소리는 고요할수록 더 또렷하게 들린다고 한다. 난 그건 병이라고 했다. 우리 할머니도 그런 소리가 들릴 때면 그 소릴 듣느라 밤새 잠을 못 주무신다고.


지금도 나는 알지 못하는 그 절대 원음을 그는 지금쯤 찾았으려나?  이 범종소리가 그의 마음에도 닿아 번뇌를 씻어주길 합장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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