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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Nov 06. 2022

記錄의 危害

너무 솔직한 노출

점심시간쯤에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는 이걸 어찌해야 될지도 모르겠지만, 너무 걱정되어 내게라도 연락을 해서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문자로는 내용 파악이 모호했다. 장문의 문자를 주고받기엔 뭔가 급한듯해서 바로 통화를 했다. 


- 무슨 일인데?

- 아침에 갑자기 웅이 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금 회사 근처에 와있는데 볼 수 있냐면서.

- 그래서?

- 당연히 오라고 했지. 오전 9시쯤이라 아침 먹었냐고 괜찮으면 해장국집에서 보자고 했지.

- 중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 그래, 그래서 조만간 함 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연락이 와서 좀 놀랬어.

- 만나긴 했네?

- 그럼. 문을 열고 탁 들어오는데 깜짝 놀랐어. 늘 깔끔하던 놈이 뭔가 어수선하고, 몇 달 굶은 거지꼴 마냥 꾀죄죄하니 금방 산에서 내려온 자연인처럼. 말도 횡설수설하는 것 같고, 입에서는 술냄새가 진동하고. 그래서 너 왜 이래? 하고 물었더니 죽겠다는 거야. 해장국집에서 만나자마자 또 소주를 까더라. 두세 병 까고 나서 간다고 해서 헤어졌는데, 솔직히 너무 걱정된다.

- 뭔 일이 터졌나 보네.

- 그래, 근데 다니던 중국에서의 회사가 아니라 집에 와서 뭔가 일이 터졌나 봐. 처자식들이 자기를 외면하더란다. 도저히 집에 머물지 못할 분위기라서 할 수 없이 집을 나와 이곳저곳 전전하며 지내다가, 어제는 밤새 소주 10병 정도 마시고 자살하려다 나를 마지막이라는 느낌으로 보러 온 거라고.

- 작년 한국에 들어와서 만났을 때도 별 이상한 점이 없었는데 1년 만에 무슨 일이 생기기엔 좀 이상하네. 뭐 별일 있겠냐. 좀 더 지켜보자.

- 저런 모습 처음 봤거든. 정말 지하철 타고 간다고 일어나서 가는 모습에 끝까지 내 눈이 떨어지질 않더라. 혹시라도 별일 없길 바라지만, 만약 나중에 혹 웅이랑 연락되더라도 내가 네게 이런 말 했다는 거 웅이한테 얘기하지 마라. 워낙에 자손심 센 놈이라. 아니 최소한 오늘은 전화도 하지 마라


웅이는 스마트한 얼굴에 노래도 잘 부르고, 친구들 사이에 의리도 있으며, 공부도 제법 잘해서 명문대의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유머 감각 있어 얘기가 재미있기도 했고, 여자 후배들도 그를 많이 따랐다. 한 때는 기자 준비를 하기도 하고, 신춘문예에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지만 잘 되진 않았다. 졸업 후 잠시 다닌 대기업을 퇴사하고는 바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일명 보따리상인 오퍼상을 했고, 약간의 부침은 있었지만, 한 번씩 히트를 치는 사업 아이템 득에 나름 성공을 하기도 했다. 그의 무용담을 들을 때면 아직 직장 내 대리 정도의 직급이었던 우리들과는 말하는 금액의 단위가 달랐다. 부러움과 동시에 그에게서 술을 한잔 받지 않은 이가 드물었다. 


그가 잘 나간다는 소문이 돌면서 주변엔 사람이 모여들고, 그의 사업수완에 편승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냄새가 나면 벌레가 꼬이는 건 당연지사. 다만 그가 얼마나 분별을 잘하고, 신중하게 결정하냐가 관건이지만, 경험의 부족은 한계이기도 했다. 결국 달콤한 사기에 넘어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재기를 하는가 싶다가 다시 제자리로 내려앉기를 몇 번을 반복하더니, 그는 사업을 접었다. 막상 어렵게 발품 팔아 수주를 따내고 물꼬를 터 이제 해볼 만하다고 할 쯤엔 여지없이 대기업의 영업사원들이 치고 들어와서 큰 몫은 그들에게 넘어가버렸다. 그 세계가 매력적이긴 하지만, 세상이 글로벌화되고, 인터넷에 의한 세계 공급망이라는 흐름에서 그는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취직. 여러 나라에 파견 근무를 하다 최근 중국 파견을 마지막으로 귀국했다. 그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기 전 개인 물품을 먼저 집으로 보내고, 직장을 정리한 후 몇 주 늦게 집으로 들어갔는데, 먼저 도착한 물건들을 그의 집사람이 정리한다고 뜯어보면서 일이 벌어지게 됐다. 


그의 박스들에는 옷가지나 소지품도 있었지만, 최근 몇 년간의 일기장이 몇십 권 들어있었다. 문제는 일기장의 분량도 적지 않았지만, 내용이 너무 자세하고 적나라했다. 이게 문제인 게 문제다. 매일 쓰지는 않더라도, 일기라는 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기록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속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현실에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얘기들도 쓰게 마련 인지리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은 당연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누군가가 봐버렸다. 외국 생활의 외로움과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정도로는 누구나 이해가 가고 동감할 수 있는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일기 자체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지 않나. 좀 더 개인적이고 은밀한 묘사 부분에서는 이 일기장을 누가 본다는 가정이었더라면 그러한 내용은 당연히 누락시키거나 미화시켰을 것이다. 그러니 일기는 일기다. 그러나 일기라서 문제다.


그걸 그 누구도 아닌 그의 부인이 보게 됐고, 남편의 사생활에 대한 내용도 내용이지만, 일기를 쓴 몇 년의 세월 동안이나 그의 생각이나 감정이 일기장의 내용처럼 지속되고 있었다는 생각까지 이르면, 그건 부인이라는 자리가 더는 의미가 없고, 그런 남편과의 결혼생활이라는 게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직접 쓰고 몇 년을 쓴 글이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정황이 되어버렸으니, 부인이 남의 일기를 본 것 자체를 문제 삼는다면 그건 개인정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다른 얘기인 것이고, 내용으로 알아버린 남편의 과거와 부인의 배신감은 어찌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웅이는 처와 아들의 반응에 난감해했고, 그건 사실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일기 형식으로 쓴 습작이요, 나중에 소설을 쓰기 위한 연습이었다고 항변했지만, 이미 떠나버린 부인의 마음은 굳어져 이혼을 거론한다. 부인의 완고함에 그는 결국 법원으로 갔고, 도장을 찍었다. 명백한 증거처럼 제시된 일기장이 법적 다툼의 대상이 되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그는 그 충격으로 계속 술을 마셨고, 일기의 내용과는 별개로 지금까지 본인이 처자식에게 한 노력과 수많은 추억들이 함께 부정되어 버리는 데에 대한 답답함이 더 컸던가 보다.


그리고 몇 주 후. 웅이는 다른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왔고, 그중의 한 명이 내게 연락을 해서 우린 다시 만났다. 나는 짐짓 모르는 척 그 자리에 참석했다. 흔히 말하는 별 시답잖은 얘기들을 하다가 웅이는 흘러 지나가듯 우스게 소리하듯 말을 한다.

- 얼마 전 내 일기장 때문에 이혼당할 뻔했잖아. 내 앞으로 다시는 일기 같은 것 안 쓴다. 일기장에 마누라에 대한 욕이나 중국에서 만난 여자 얘기들을 너무 솔직하고 자세히 썼더니, 그걸로 진짜 경을 치를 뻔했거든. 


나는 무슨 일인지 좀 더 상세히 말해보라고 얘기하려다 말았다. 남의 집안 사정이다. 그래도 다시 만나 반가웠다. 오히려 나는 다른 말로 돌렸다.

- 일기장으로 네 집사람이 그 정도로 반응했다면, 너 그러지 말고 글 써봐라.

- 그럴까? 내 옛날 꿈도 문학도였거든.


일기장의 해프닝으로 이혼당할 뻔한 친구를 보며 새삼 글의 어떤 힘을 본다. 

글쓰기의 위력(威力)과 위해(危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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