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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Sep 16. 2022

독행

기꺼이 정한 구속

'변화 속의 균형 유지'란 파도 위의 부표처럼 리듬을 타듯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하루하루를 무난하게 잘 지내는 것인 듯하다는 말에 그는 '모든 변화는 변하지 않는 것이 기준이요, 그 중심은 규칙적인 생활에 있다.'라고 한다. 오르내리는 상황에 적응함이 현실에 부합되는 면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상황에 따라 바뀐다면 그건 허상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바람결 따라 누웠다 일어는 갈대의 유연성은 줄기 속 굳은 심지의 힘이 있어서 그렇지 않으냐고 다시 물으니, 그는 그 힘조차 갈대 뿌리가 대지를 잘 잡고 있기 때문이란다. 변화 속에서 변치 않는 것이란 말도 어려운데 그는 말이 아닌 행동 측면에서 생활을 강조하니 더 어렵다. 사례를 들어달라고 했다. 


계절에 따라 해 뜨는 시간이 날마다 조금씩 바뀌고, 그 변하는 일출 시간에 맞춰 하루를 시작하고 움직이는 게 일반적이지. 그런데 겨울과 여름의 일출 시간이 3시간 넘게 차이가 벌어져. 그래서 내가 정한 새벽 4시 반에 매일 일정하게 일어나 10km를 달리는 거야.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춥든 덥든 날씨 변화에 상관없이 일정하게 내 할 일을 한다네. 자연의 변화는 그 변화 그대로 바라볼 뿐이지. 춘하추동이 모두 그대로 좋아. 그건 그대로 두고 나는 나의 할 바를 할 뿐이고.


스스로에게 정한 약속을 꾸준히 지켜낼 정도의 인간이라면 자기 절제에 철저 사람이다. 보통은 쉽지 않은데 그는 그렇게 산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흔들리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더욱 항상 함에 충실하려 노력한단다.


그런 자기 관리에 충실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타인에 대해서도 동일 잣대를 적용시키는 경향이 흔해서 일면 매정한 듯 보이기도 하고, 까칠한 면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이들이 반드시 몰인정하고  비인간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인간적 거래에 있어서는 깔끔하게 보인다.  흔히 말하는 give & take에 관해서는.


한 번은 그가 내게 어쩌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 지인이나 친구의 가게에 갈 참이면 가능한 여유가 있을 때 방문하라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니, 자칫 아는 사람이 일하는 곳이니 한 번 가서 얼굴도 비추고 물건도 좀 팔아준다는 생각으로  갈 경우 괜히 뭘 더 바라게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이왕 갈 요량이면 거기서 나름 괜찮은 물건을 고르고 나서 충분히 값을 치르라는 것이다. 가게 주인 입장에서도 아는 처지에 야박하게 할 수도 없고, 싼 물건이면 깎아주기도 그렇고, 덤으로 뭘 주기도 꺼려져 결국 방문을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늘 일정하게 움직이고 뭔가를 꾸준히 하는 어떤 행동이 강제성 없이 자발적으로 그것도 혼자서 한다는 게 쉽지 않다. 그것도 1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면 이미 어떤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닐까. 살다 보면 많은 변수들이 존재함에도 그렇게 매일 일정 시간에 정해진 뭔가를 지속하는 사람들에겐 존경심까지 생긴다. 그들도 때론 아프기도 하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때도 있을 것이고, 가족이나 주변 누군가 관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바빠지기도 할 텐데도 그렇게 똑같이 일정하다. 그도 그렇게 산다.


그렇게 열심히 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뭔가 답답하고 갑갑한 울분 같은 것이 쌓여 그 답답함을 해소하려는 차원에서 그렇게 열심이지 않을까? 그렇게 열심이지 않고서는 뭔가에 빠지지 않고선 미쳐버릴지도 몰라 그렇게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는 게 아닌가? 이 말에 그는 아무런 부정이 없다. 그게 오히려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 마치 번뇌가  수련의 도량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세상사 다 福이기도 하거든. 해결할 수 없는 짐이 그를 버티고 나아가게 하는 경우도 많으니.


살면서 하다못해 감기라도 걸리는 게 일상사인데 그땐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그는 그때도 운동화를 신는단다. 단지 평소보다는 강도를 낮춰 나름 조절하면서 움직인다고. 그런 지독함이 주변 가족들에겐 어떨까? 당신이니까 그렇게 하겠지만 난 그렇게 못살아하고 지레 물러서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가족들로부터 독한 사람으로 외면받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그는 타인은 물론 가족이라 할 지라도 본인처럼 살라는 말을 한 적 없다고 다. 내가 꼭 옳은 것도 아니지만, 누구든 그의 자율적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는 선에서 멈춘다. 간혹 그가 보기에 분명 사달이 날 일이라 해도 의견을 한두 번 제시하는 정도에서 입을 닫는단다. 그러다 정말 일이 어긋나도 그는 재차 거론 않는단다. 왜 그렇게 하느냐 물으니, 첫째는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둘째는 사후 아무도 답을 구하는 물음이 없어서, 셋째는 그렇게 스스로 몇 차례 실수나 실패를 반복해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경우도 있어 그렇단다.


한 번은 몇 년을 모은 적금을 탔는데, 그의 부인이 쓸 일이 있으니 달라고 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건네주었단다. 나중 알게 된 일이지만, 그의 부인은 친구의 말을 듣고 주식에 투자했다가 원금이 반토막 나고 말았다. 그제야 부인은 미안해하면서 그에게 돈의 내막을 얘기하더란다. 그 몇 달 동안 그는 어디에 썼는지, 어떻게 됐는지 한 번도 묻지를 않았단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의 말인즉, 흥하든 망하든 결국 본인에겐 득이란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니, 만약 흥해서 돈이 더 늘면 그만큼 이득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혹 망하면 내가 어떻게 됐냐고 전혀  묻지 않으니 더 불안해하고 미안해하지 않겠느냐고.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지만 끝내 아무 말이 없었으니 그를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됐다는 말이다. 

  

그가 내게 보여준 다리엔 동전 크기의 검게 자리 잡은 피부 흉터였다. 벌써 몇 차례 이렇게 생겼다 벗겨졌다 반복이란다.  누구든 할 수 있으나 누구나 하기 쉽지 않은 자기와의 약속 지킴. 그가 이렇게 열심인 이유가 더욱 궁금해졌다. 다음에 꼭 물어보리라. 어쩌면 내가 간과했던 것들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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