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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Sep 05. 2022

눈 어두운 땅

군자처럼 적당한 멈춤을 아는 곳

양지바르고 따뜻한데 전망도 트이고

뒷배경으로 작은 산이 병풍처럼 포근하다

도로를 끼고 옛 집터였다니 맘에 꼭 들었다

놀랍게 지명도 중니의 지지(知止) 마을

성인의 이름에 '그칠 줄 아는' 곳이란다


경제적 곤란이 와서 몇 차례 매매를 시도하다 접었다

눈 어두운 땅, 맹지란 걸 살 땐 몰랐다

길은 있어도 '길 없는 길'이란다 마을 농로처럼

집사람은 실컷 놀린다 하필 땅 이름도 그러냐고

아는 척은 다 하더니 하는 짓 보면 지지리 궁상이냐고


나중 이 사실을 알게 된 엄마는 당장 같이 가보잔다

척 보더니 씩 웃고는 그래서 여태 남아있었구나 한다

어미는 당장 호미 들고 내게는 삽질을 시킨다

고추 심고, 들깨 심고, 빈 고랑에 호박을 심는다


퇴행성으로 허리 아프고 무릎 절뚝거리던 사람이

잡초 뽑을 땐 딴사람이 되어 눈빛이 뭔가에 홀린 사람 같다

도둑 같은 풀은 돌보지 않아도 어찌 저리 잘 자라느냐고

호박 따서 옆집에 나누고 감자 삶아 놀이터에 돌린다


내놔도 아무 거들떠보지 않는 땅이

아프고 지루한 노모의 소일

밭일 갔다 와서는 몸 곳곳에 파스를 붙이는 줄 뻔히 아는데

이젠 삽질 제법이라고 은근 나를 부추긴다


버스도 다니지 않아 차 기름값이 더 든다고 투덜대도

아들을 아예 농부로 만들 참이구만 탓해도

농사 싫어 헐 값에라도 넘길 거라 협박해도

할매는 고구마 캐고 나면 또 뭘 심을지 궁리다  


눈치 빠른 노인네

안 팔릴 줄 아나보다

약값 더 드니 부디 무리 말고 지지(知止)하소

아, 두 손 들어 항복. 내가 하는 게 그렇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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