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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Feb 19. 2022

그녀는 예뻤다

모든 호의는 고의다

 같이 일을 하게 되어 기뻤다. 내가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더욱 기분이 좋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내 누이이지 않은가. 그녀는 무척 친절했고, 일처리가 깔끔했다. 업무분담으로 시킨 일은 물론이고, 청소도 그렇지만 환경을 꾸미고 분위기를 화사하게 만드는 탁월함에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한 번은 장미와 안개꽃을 한 묶음 사 와서는 대기실 탁자에 꽃꽂이를 해뒀다. 그것도 자비를 털어 사온 꽃은 물론 오아시스까지 준비해서 꽃장식을 했다. 남는 꽃은 오는 손님들에게  좋은 하루 되시라고 한 송이씩 나눠주었다. 그런 그녀를 내가 어찌 외면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는 이혼을 하고 조카 2명을 키웠다. 딸 아들 2명의 자식들은 홀어머니인 그녀의 기대에 맞게 공부도 곧잘 했고, 나름 서울의 명문대를 각각 입학했다. 나는 사업장의 형편에 맞게 최대한 급여도 올려주고, 좋은 일 있을 때마다 보태라고 보너스를 줬다. 물론 타 직원들 몰래 송금했다. 심지어는 마누라도 모르게 도움이 될 수 있는 한 기꺼이 경제적 지원을 했다.     


 가까이 모친이 살고 계신데 가끔씩 엄마를 보러 가지만 딸이 함께하면 더 좋을 듯해서 나는 그녀와 상의를 했다. 누이는 이혼을 한 이후 상한 자존심으로 엄마와 잠시 등졌던 기간도 있어 나는 이 일로 회복의 기회를 주고 싶기도 했다. 쉽게 얘기를 꺼내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영 외면할 부모 자식의 관계는 없지 않은가. 처음엔 약간 망설이더니 본인은 애들 키우느라 힘들어 엄마에게 직접적인 경제적 도움은 줄 수는 없고 대신 육체적 도움은 할 수 있는 데로 하겠노라 했다. 당연 나는 동의를 했고, 그녀의 몫까지 합쳐 엄마의 생활비를 줬다. 이왕이면 몸으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엄마에 대한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미안함을 대신하라고 그녀에게 엄마의 생활비를 직접 건넸다. 멀리 타국에서 생활하는 다른 형제들은 이 얘기를 듣고 자신들도 얼마를 보태는 걸로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누이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대신하고자 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누이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누이도 서울로 이사를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 이상 같이 일을 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그동안의 노고와 쌓인 정으로 퇴직금 외에 서울 살이에 보탬이 되라고 나름 큰 금액을 준비해 봉투에 넣어줬다. 그런데 엄마도 같이 서울 가기로 했단다. 정말 엄마랑 같이 서울서 살기로 했냐고 재차 물었더니 그렇게 하기로 엄마도 동의를 했단다. 새삼스럽기도 해서 며칠 후 엄마에게 확인을 해보니 엄마도 여기 집 팔고 서울에 빌라를 사서 누이랑 같이 살기로 했단다. 이혼하고 혼자 애들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기도 해서 뭔가 보탬이 되고 싶기도 했고, 같이 밥 먹고 목욕도 할 거라며 좋아하는 모습에 기대도 한껏 부풀어 있었다. 텃밭도 가꾸며 이뤄갈 서울 살이 얘기들을 듣고 있자니 이미 계획이 끝나 있구나 싶었다.    


 그렇지만 80세 넘은 엄마 나이에 그것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서울 살이가 걱정됐지만, 들뜬 모습들이 너무 서두른다 싶은 불안감을 떨칠 순 없었지만, 차마 엄마 인생을 내가 뭐라고 끼어들까 싶어 개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누이야 조카들이 서울에 있으니 그렇다 손 치더라도 엄마는 왜 서울 생활을 결심했냐고 물어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말에는 나도 더 이상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본인 의사가 그렇다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울 살이 3개월 후 늦가을에 찬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흩날리던 날. 엄마는 단풍놀이나 갈 법한 가벼운 나들이 외투의 옷차림과 그야말로 봇짐 하나만 어깨에 달랑 메고 내게 왔다. 볼 살은 더 빠지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서울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삿날이 정해지지 않았다며 정해지면 당연히 일러준다는 누이는 결국 이사를 하고 나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 짐을 풀면서 이제야 겨우 여유가 생겼다며 연락 온 누이의 전화 목소리는 큰 문제를 해결한 듯이 가뿐했다. 그런데 얼마 후 엄마는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서울 얘기가 나오고 나서부터 떨쳐지지 않던 그 찜찜함을 확인하는데 3개월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엄마를 진정시키고 당장 서울로 전화를 했지만 누이는 수신 차단을 시켰는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는 본인의 전재산이었던 지방 아파트를 팔아 서울로 가서는 홀몸의 추운 옷차림으로 내려왔다.    


 서울 살이 낯섦도 그러했지만 더욱 힘든 건 누이의 간섭과 구박이었단다. 북한산 자락 아래 빌라라서 가을 없이 닥친 이른 추위로 온수를 틀면 물 아깝다고 하고, 휴지도 아껴 쓰라고 하고, 냉장고 문도 자주 열지 말라고 했단다. 서울 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입안 혀처럼 굴더니, 이사 가자마자 돌변해서 처음엔 엄마도 누이가 적응이 힘들어 그렇거니 했는데 아니었단다. 후회해도 이미 늦었음을 알았을 땐 건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겨우 남은 건 내가 서울 가기 전 비상금으로 쓰라고 찔러준 백만 원뿐이었기에 엄마는 매일 그 돈을 확인하면서 가출을 결심했기에 더욱 그 돈을 움켜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외국 사는 형제들도 누이에게 연락을 취했으나 차단된 수신음만 확인했다. 지금까지 누이 편으로 보낸 엄마 생활비는 누이 본인이 엄마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할 때에만 쓸 만큼 조금씩 쪼개어 줬다는 걸 나중에 듣게 됐다.


 이 모든 게 누이의 큰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밤새 나를 흔들어 깨웠다. 법적 다툼으로라도 해결하려 했으나, 엄마는 괴심하지만 그러지 말란다. 넌 형제지만 내겐 자식이라며. 속인 놈보다 속은 놈이 더 나쁘다고 했던가. 꼼꼼히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그러려니 맡겨둔 내 잘못도 한몫이라.


 당황스러울 만큼의 모든 호의는 고의임을. 비록 악의가 아니라 할지라도. 누이여 부디 끝까지 잘 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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