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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Feb 19. 2024

비진물수非眞勿授

진리가 아니면 전하지 말지니

"팔을 올려봐. 그렇지. 어때?"

백발을 휘날리며 붉은 얼굴의 병원장은 큰 덩치에 걸걸한 목소리가 우렁차다. 가운을 입은 제자들이 그를 도열하여 삥 둘러 서있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앉아서 침 맞던 환자는 팔이 올라가고, 주변의 다른 환자들도 오호 하는 신음을 뱉는다. 다음 순번의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은 원장의 치료를 받으면 나으리라는 기대와 함께 꼭 그렇게 되리라는 믿음의 눈빛이다.


온갖 치료를 해도 낫지 않던 어깨의 통증이 사라지며 팔의 움직인다. 자, 다시 팔을 들어봐. 그의 침 한방에 끄떡 팔이 올라간다. 그를 시봉 하듯 서있던 다른 수련의들도 그의 치료에 한껏 고무되어 미소를 짓는다. 내가 이 분 밑에서 배우고 있는 게 다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냐는 표정이다.


큰 원을 돌리며 태극무를 추는 듯한 그의 현란한 손동작을 따라 사람들의 시선이 손끝을 쫓는다. 그가 쥔 침에 우주의 기운을 실어 경락의 흐름을 소통시키고 막혔던 혈을 뚫는다. 그의 손동작에 취해있는 동안에는 그의 치료는 절대적이다. 참관하고 있는 이들 중에 아무도 왜 그런 경혈의 침자리를 선혈 했으며, 보사법이 어떠한지, 치료의 진단 기준이 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못한다. 분위기에 눌려 그렇기도 하지만, 결과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아픈 이가 나았으니.


명절 연휴 즈음하여 병원장 댁으로 제자들은 문안 인사를 드린다. 조그만 선물을 손에 들고, 좋은 가르침에 감사하며, 원장님의 무병장수를 기원한다. 서로의 덕담이 오간다. 술잔이 돌면서 취중에 하나둘 침치료 비법의 전수가 이뤄지기도 한다.


그렇게 친분 쌓고 그렇게 인맥이 형성된다. 가끔 형편이 어려운 제자에게 통 큰 지원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사단이랄 것까지는 아니지만 나름의 모임이 이뤄지고 추종자들이 따른다. 그의 말이 수첩에 적히고, 더 많은 의학적 비방을 받아내기 위한 엎드린 처세가 따른다.


며칠을 참관하며 그의 치료법을 배우고 익힌다. 치료하는 그의 손짓을 따라 해보기도 하고, 그 동작에 오묘한 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에는 그의 춤사위 같은 액션의 의미를 몰랐다. 짧은 시간에 그의 모든 것을 알 수도 없다. 진실을 보고 싶었다.


한 번은 그에게 치료를 받고 나가는 환자를 따라가 그에게 물었다. 조금 전 치료를 받으셨는데, 좀 어떠셨는지. 그런데 그의 대답은 치료실에서 보인 행동과 달랐다. 그땐 좀 나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지만, 원장님의 카리스마에 눌려 좋아졌다고 말해버렸단다. 주변의 눈치도 보여서 얼떨결에 통증이 덜하다고 말한 것 같단다. 또 다른 이에게도 물었다. 나아지고 가벼워졌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다시 그의 료를 참관한다. 이 번엔 원을 그리는 그의 오른손 동작이 아닌 그의 왼손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그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향해 큰 원을 그리는 동안 그의 왼손은 미리 혈자리를 찾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오른손에 쥔 침으로 기운을 모아 자연스레 춤추듯 놓는 침이 주효 작용인 줄 알았다.


그래도 그의 자신감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다. 보통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노출을 꺼려 감추지만 그는 흔쾌히 보여준다. 전형적인 권위의 과시다. 한의학 치료 중 침과 한약이 주된 치료법인데, 즉효를 내는 침치료를 그렇게까지 구현하는 자체도 대단한 면이다. 우리 몸의 에너지 순환을 기氣의 활동으로 본다면 의사와 환자의 첫 대면에서 서로의 기싸움이 일어나고, 치료를 위해서는 상대에 대한 기선제압과도 같은 기운의 압도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자신 없어하고 자꾸 숨거나 피하려는 의사에게 내 몸을 맡길 환자는 없으니.


그런 그에게도 다른 면이 있었으니 그건 한약 처방에 대한 공개는 은밀했다. 물론 그의 치료가 침치료 위주이기에 그럴 수 있지만, 좀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효과는 한약에서 나오는 게 더 일반이다.


그의 손발이 되어온 수제자들은 진료를 시작하는 단계에서 진맥을 하고 침 치료를 하며 처방전을 내기까지의 과정을 지켜본다. 그런데 원장이 처방을 쓸 땐 자주 주위를 물린다. 그래도 눈치가 빠른 제자 중에는 원장실에서 나가는 동작이 굼뜨다. 원장의 처방에 대한 궁금증에 머뭇거린다. 혹 다른 뭔가 모르는 비밀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다.


회식 때 분위기가 무르익고 누군가 원장님을 칭송하면서 한껏 기운을 올린 후에 한약 처방에 대한 질문을 한다. 얼큰한 취기에 원장은 웃으며 아직은 공개할 수 없는 비방집이 있음을 시사한다. 때가 되면 오픈하겠다는 말을 남긴다. 이제 몇 달 후 떠나야 하는 이들은 입술이 탄다. 미래를 보장하는 보물이 될 그 처방집이 필요한 거다.


서로 눈치를 주고받기도 하고, 같은 입장의 공범이 되기도 한다. 결국은 원장이 혼자처방을 쓸 때 원장실 탁자의 서랍에서 낡은 책자를 꺼내 처방전을 채우는 모습이 띈다.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그 책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제자들의 귀에 들어가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리고 은밀한 작업들이 이뤄진다.


모두 퇴근하고 야간 당직의로 근무하는 이들 중에서 누군가 그의 서랍에 손을 댄다. 그리고 그 책자를 꺼내 훑는다. 작고 누런 책. 표지에 적힌 제목은 비전방秘傳方. 소책자 속의 내용은 필사본을 복사한 복사본이다. 어떤 질환에 무슨 처방이 특효라는 문구가 보이고, 구석구석에 원장 필치의 펜글씨들이 깨알처럼 적혀있다.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그 비전방에는 기본방이 적혀있고, 각 증상에 따른 가감될 약재들이 주석으로 적혀있다고 한다. 예전 어느 명의가 정리한 처방이라며 가보로 전해지는 비방집을 구해 한의사 몇몇이 돌려보며 스터디를 통해 완성본으로 따로 필사한 것이다. 원장도 나름의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라는 후문이다. 비전방의 실체는 알려졌지만, 그 책을 수중에 넣을 방법을 찾지 못한다. 밤마다 베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자들의 탄원으로 원장은 비전방 처방집을 만지작 거리다 공개하기로 결심한다. 확실히 보스의 기질이 느껴진다. 그렇게 비전방은 알음알음 알려졌으나, 그 주변의 지인들 외의 큰 공감을 받지는 못했다. 그런 류의 서적이 많았고, 또 그 처방전의 방해方解가 빈약했다. 다만 원장은 나름의 관觀을 세워 그 처방집을 사용했으니 나름의 효과는 있었으리라.


그렇게 어느 유명인이 잠시 왔다가 간다. 소문을 듣고 먼 거리에서 온 이들도 있었고, 기적처럼 나아서 새 삶을 시작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치료법이 통용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화려한 침술과 비밀스러운 처방들이 은밀하게 전해져도, 단순히 되고 그대로 모방한 술術의 한계다. 따라 하기만 해서는 그 카리스마를 쫓아가지 못하고, 병원의 권위도 가지지 못한 채로는 똑같을 수 없었으니.


진리는 이미 자체로 완전해야 진리다.

지금 여기서 구현되고, 누구에게나 자각되어야 진리다.

극소수의 은밀한 먼 미래의 비밀스러운 것이라면 속임수다. 전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궁금증을 일으킨다. 불량 식품이 더 알록달록 눈에 띄고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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