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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Feb 23. 2024

궁색한 답변

써놓고 더 부끄러운

태백산맥을 넘어 동해안에 위치한 어느 시골에 함박눈이 내렸다. 초겨울이나 한겨울보다는 겨울이 끝나갈 무렵에야 본격적으로 눈이 내린다고 한다. 엄청 눈이 온다. 해마다 반복되는 일인데도 볼 때마다 세상이 온통 새하얗게 일색인 광경은 마음을 흔든다. 산에도 길가에도 집 앞마당에도 무릎이 푹푹 빠지게 쌓인 눈. 60대 중반을 넘긴 지인이 설백의 풍경을 담아 사진에 이어 문자를 보내왔다.


개가 뛰니 나도 뛰네

내가 뛰니 개도 뛰네


내리는 눈에 개집을 뛰쳐나와 달려가는 진돗개와 그 모습에 같이 덩달이 웃고 있을 지인의 모습이 떠올라 글을 보는 순간 너무 재밌었다. '습득과 한산'의 고사가 떠오르기도 한다. 여기 동남쪽 끝 바다에선 올 겨우내 눈이 없어 강원도의 설경이 부럽기도 하다. 이쪽눈 사정을 보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변화라면 얼마 전 매화가 피었다. 대신 밤에도 피어있는 홍매를 찍어 보낸다. 향기를 전해줄 수 없으니 사진 제목을 달아 부친다.


야매.

여기선 환상

거기선 현실


거기서 그렇게 계속 내리던 눈 어느 순간 비가 되어 내렸던가 보다. 날씨 변화의 무상함이라. 비는 언제든 눈으로 변하여 다시 대지를 덮겠지만. 내린 비는 힘들게 빗자루로 쓸고 삽으로 치우기보다 더 빠르게 눈밭을 비운다. '인간은 속여도 계절은 못 속이나 봐, 땅 밑에 봄이 오니 속절없이 눈이 녹네.' 문자를 받는 순간 어지럽다. 비가 온 하늘에서가 아니라 땅 속의 봄이 눈을 녹이는구나.


한참을 그가 보낸 문자를 보다가 그에게 답을 한다. '변치 않으리라 믿으니 속지요. 눈앞에서 무너지는 분명한 변화를.' 답장을 보내고 후회했다. 나 또한 그런 변화에 울고 웃고 정신을 못 차리면서 무슨 그런 궁색한 답변을 보냈는지 한심했다. 깜도 안 되는 놈이 그릇도 안 되는 흉내를 내는 꼴이라 부끄러웠다.


그 후 며칠이 지나도록 답변이 없더니 돌연 그는 소포를 보낸다. 책이다. 세상 가득 붉은 꽃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표지의 서화집이다. [시인의 붓] 김주대 문인화첩. 그런데 이상한 것은 똑같은 책을 두 권 보내온 것이다. 시인의 시도 좋지만 시인이 그린 그림은 더 멋지다.


잘 보겠다고 고맙다고 말하려고 전화를 건다. 바쁜지 벨만 울리고 다른 연락도 없다. 한참 그에게 문자가 하나 뜬다. 그의 문자에 더 부끄럽고 숨고 싶다.


왜 두 권이냐고?

하나는 앞에서 읽고, 또 하나는 뒤에서 읽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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