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전해주는 진심(외할머니의 산)

엄마와 딸이 사랑하는 법

by 세시반

외할머니의 산


엄마 이 나무는 저 나무보다 얇아요

엄마 이 구멍에 도토리를 넣어요

엄마 부러진 나뭇가지로 막대기 만들어주세요

엄마 이 나뭇잎 밟는 소리 재밌죠

엄마 겨울인데 여기 초록색 이파리도 있어요

엄마 지난번에 할머니랑 여기서 밤 주웠는데

엄마 여기는 돌탑 쌓는 데예요 돌 찾아주세요

엄마 포기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엄마 다 왔어. 계단 한 번만 올라가면 돼

엄마 조심해. 내려갈 때가 더 위험해요


괜찮아~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예쁜 거지~


나무가 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예쁜 거랬어

할머니가




사골국을 잔뜩 끓여 놓고 엄마는 산으로 향했다. 아이의 외할머니인 내 엄마에게 산은 숨구멍이었다. 삼 남매를 키우며 정신없는 일상을 살던 그녀에게 산은 도피처이자 휴식처였다. 산에 가는 엄마를 보는 게 좋았다. 무언가를 사랑하고 열심히 사는 엄마의 모습은 멋져 보였다.


엄마는 산을 타다 산에서 죽고 싶을 정도로 산이 좋다 했다. 백두대간을 타던 엄마의 닉네임은 노숙인이었다. 집을 떠나고 싶은 갈망이 느껴졌다. 집순이인 엄마는 산에서 만큼은 누구보다 열정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강했고 누구보다 빨랐다. 노숙인이 그렇게 자유로운 단어인지 처음 느꼈다.


손주가 아직 잘 걷지 못하던 시절, 엄마는 아기띠를 등으로 둘러메고 동네 뒷산을 올랐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에게 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산을 보여주던 엄마는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도 행복해 보였다. 종종 할아버지와 아빠에게 번갈아 안아달라 하며 산을 오르던, 할머니 등의 그 아이가 이제는 안아달라는 말 없이 제법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정상에 올라가면 힘이 들까 봐 "지금 포기해도 돼.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해"라고 말리던 내게 "엄마가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갈 거예요" 하던 패기에 감동받기도 했다.


첫 번째 고지를 오른 아이는 자신감이 넘쳤다. 할머니 집에서 놀다가 할머니에게 나 이제 산에 잘 오르니 산에 가잔다. 처음으로 아이를 산에 따라가지 않고 할머니에게 맡겨보았다. 한참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아 오래 걸리나 보다 했다. 돌아와서는 별말 없이 "재밌었어요"가 다였다. 그리고 며칠 후 친할아버지와 함께 다시 산에 오르게 되었다.


2025년 12월 31일. 아주 매서운 한파였다. 아이는 굳이 굳이 산에 가자 떼를 썼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 할 아버지는 손주가 감기에 걸릴까 계속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걱정했지만 아이는 꿋꿋했다. 산에 오르는 내내 아이는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올라가는 길에 이렇게 볼거리가 많았나. 등산이 이렇게 재밌는 일이었나. 이렇게 오르막길이 쉬울 일인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늘 오르기 바빴던, 힘들기만 한 오르막 길이었는데 아이와 걷는 내내 신기하고 재미있는 놀거리 투성이었다.


얼마 전 외할머니와 등산할 때 배운 숲놀이들이었다. 아이는 내가 하지 않은 말들을, 내가 하지 않은 놀이들을 하며 이 숲에 사는 난쟁이처럼 나를 산으로 이끌었다. 엄마가 이렇게 아이와 놀아주었구나. 우리 아이가 엄마처럼 산을 사랑하게 되었구나.


길을 잃고 방향감을 상실한 요즘... 무너진 몸과 마음을 엄마의 탓으로 돌리며 엄마를 원망했다. 며칠 전 엄마에게 엄마는 왜 이렇게 말을 밉게 하느냐고, 엄마는 나를 사랑하긴 했느냐고, 엄마의 가슴에 모질게 못질을 하는 내게 결국 눈물을 흘리며 그마저 사과하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려가는 길에는 더 조심해야 하는데 나의 발걸음이 서툴렀다. 부러지면 부러진 대로 예쁜 것인데 조금 부러진들, 그래도 나무지. 사람이지. 괜찮다. 아이의 언어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온 날.


잊고 있었다. 긍정적인 언어로 세상을 보는 법을 알려주던 내 엄마를. 산만큼 자식에게, 손주에게, 가족에게 진심인 엄마를. 엄마도 사랑받고 싶다 했다. 나와 같이 산에 오르고, 나와 같이 누워서 TV를 보고, 나와 같이 대화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결혼하면서, 내 가족이 생기면서, 엄마는 나를 뺏긴 것 같다고 했다. 처음 알게 된 엄마의 진심이었다.


"엄마...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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