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세상이 다시 하얗게 되는 순간(눈)

새하얀 눈을 지켜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

by 세시반


아무도 닿지 않은 순수한 아침

밤새 소복하게 내려앉은 눈이

조용히 너와 나를 맞이한다


빈 종이에 그림을 그리듯

너는 네 손바닥을 찍고

내 손바닥을 찍어

순수에 우리를 담고 싶어 한다


그래서 너는 눈을 기다리는가


아무도 닿지 않은 무거운 새벽

몇 시간째 소복하게 쌓인 눈을

조용히 치워내는 일을 한다


너와 나의 순수한 아침을 위해

눈이 오기 전부터 마음을 쓰고

눈이 오고 나면 몸을 써

아무도 밟지 않은 그 길을 애써 뚫고 간다


그래도 너의 눈을 지켜주고 싶어


새하얀 눈으로 젖은 네 발을 위해

누구보다 순수를 간직한

푹푹 젖은 그의 새까만 신발




재난 담당이었던 남편은 비소식, 눈소식이 있으면 늘 긴장하고 걱정했다. 언제 불려 나가 언제 들어올지 모를 불확실한 하루하루를 책임감으로 버티던 1년이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던 지지난 겨울, 2025년 설 연휴에는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전날 밤 비상에 걸려 불려나가야 했다. 1박 2일 후 우리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까지도 비상근무가 해제되지 않아 쓸쓸히 연휴을 보냈던 적이 있다.


이번에는 다행이도 유난히 눈이 오지 않은 겨울이었다. 아이는 썰매와 모래놀이 장난감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후 내내 눈을 기다렸다. 눈이 오길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는 일어나 아빠가 없으면 "아빠 비상 걸렸어요?"라고 말하곤 했다. 비상이 뭔지도 모르고 비상을 기다렸던 게 아닐까.


눈이 조금만 내려도 아이는 추위 따위 잊은 채 온 바닥을 휘젓고 다녔다.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지고 끝내 열감기에 시달렸음에도 다음에 내릴 눈을 또 기다렸다.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던가. 마냥 눈이 좋기만 하던 시절. 언제부터일까. 눈이 질퍽이고 거추장스럽고 불쾌하고 새까맣게 보이기 시작한 건.


매년 첫눈 오는 날이면 엄마는 말했다. "윤아, 첫눈이 온다~ 오늘 더 행복하길 바라~" 그때는 몰랐다. 그저 눈이 불편하기만 했던 질풍노도의 시기. 첫눈 오는 날 밤, 평소와 달랐던 저녁 메뉴, 칼질해서 먹었던 접시에 담긴 겸양식 돈가스와 따뜻한 옥수수 수프. 나의 순수를 오래오래 지켜주고 싶었던 엄마의 마음을. 새하얀 눈에 담긴 부모의 마음을.


눈과 함께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어둠이 짙게 내린 눈길 위에서 하염없이 썰매를 끌었다. 둘 다 코끝이 새빨개지도록 새하얀 눈 위에서 아이처럼 웃었다. 아이의 순수에 우리도 순수로 돌아간다. 새까만 눈이 다시 새하얗게 보이기 시작한 건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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