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추운 겨울날 달봉이는 매서운 눈보라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집이 아니었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엄마도 아빠도 보이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엄마 아빠가 물건을 집어던지고 소리 지르며 싸우던 기억은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바탕 싸우고 이틀 만에 들어온 엄마와 아빠는 배변패드에 쌓인 달봉이의 똥오줌을 보자 다시 화가 치미는지 발로 달봉이를 걷어차고 또 싸우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가 싸울 때마다 달봉이는 화장실 구석에서 싸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까 아빠한테 발로 차인 옆구리가 욱신욱신 아파왔지만 달봉이는 차디찬 화장실 바닥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이틀 동안 사료 한 알도 먹지 못해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 나가면 분명 얻어맞을게 뻔했기에 달봉이는 배고픔을 애써 참으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달봉이가 엄마 아빠를 처음 만난 날은 정확히 2년 전이었다. 불꽃같은 사랑을 시작한 엄마 아빠. 아빠는 엄마의 생일 선물로 달봉이를 선물했다. 강아지를 좋아했던 엄마는 아빠의 선물에 행복해했고 한동안 이 셋은 세상 누구보다도 행복한 가족이었다. 쉬는 날 애견카페나 애견 운동장에 가서 달봉이가 친구 강아지들이랑 어울려 노는 모습을 흐뭇해하면서 바라보던 두 사람이었다. 달봉이를 위해서 간식도 건조기에 직접 말려서 주고 사료 하나하나 성분을 따져가며 줄 정도로 달봉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사람들이었다. 달봉이에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래브라도 레트리버였던 달봉이는 신기하게도 성냥 켜는 재주가 있었다. 달봉이의 첫 번째 생일날 엄마는 달봉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강아지 수제 케이크를 사 왔다. 엄마 아빠가 달봉이 생일상을 차리느라 분주한 사이 케이크와 동봉된 성냥을 보고 무심코 켠 달봉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성냥 켜는 강아지를 본 엄마 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달봉이에게 입을 맞추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며 달봉이 자랑에 행복해했다. 성냥을 켠 자기를 보고 엄마 아빠가 행복해하자 달봉이는 그때부터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수시로 성냥을 켜서 웃게 했다. 그들이 우울하거나 힘들거나 슬플 때마다 어린 래브라도 레트리버는 두 사람을 위해 성냥을 켰고 그들은 그때마다 달봉이로 인해 행복해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달봉이가 두 살이 되기 몇 달 전부터 엄마 아빠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랑이 시들해지고 성격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두 사람은 사사건건 싸웠다. 처음엔 아무리 싸워도 달봉이 케어나 산책은 거르지 않았던 두 사람은 언젠가부턴가 달봉이를 홀로 두고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직 혈기왕성한 두 살 안된 레트리버 달봉이는 하루 종일 엄마 아빠를 기다리느라 지루해 장판이나 벽지 전선을 물어뜯었는데 그때부터 달봉이를 향한 매질이 시작된 것이다. 두 사람의 싸움은 점차 잦아지고 격해졌고 그럴 때마다 달봉이는 그들의 싸움을 차디찬 화장실 안에 숨어 두려움에 떨며 지켜봐야 했다. 한 번은 두 사람이 싸우고 온 집안이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달봉이가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성냥을 켜고 다가가갔다. 성냥개비 불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엄마 아빠에게 다가간 달봉이. 하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싸늘한 눈빛의 두 사람의 표정을 보고 슬그머니 성냥불을 끄고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가 아닌 화장실 바닥이 달봉이의 잠자리가 된 지 오래됐지만 차갑고 딱딱한 타일 바닥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달봉이가 엄마 아빠 앞에서 마지막으로 성냥불을 켠 날 그들은 달봉이를 또다시 홀로 두고 이틀 동안 들어오지 않았다. 그동안 달봉이는 사료 한 알 먹지 못했고 이틀 만에 들어와서 난장판이 된 집을 보고 화가 난 아빠의 매질에 달봉이는 정신을 잃었다.
늦은 밤 매서운 한파 속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낀 달봉이가 잠에서 깼다. 달봉이는 어느 유기견 보호소 앞에 묶여 있었다. 옆에는 달봉이의 하네스와 달봉이가 그토록 좋아하던 성냥갑이 산책 가방에 담겨 놓여있었다. 보호소 안 쪽에서 간간히 개들 짖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달봉이는 자기가 왜 여기 묶여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지? 엄마 아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지? 갑자기 심장이 조여 오는 슬픔에 달봉이가 하늘을 보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달봉이의 구슬픈 하울링 소리에 보호소 개들이 일제히 맹렬하게 짖고 함께 하울링을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보호소 아이들이 달봉이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쳤다.
도망쳐!!! 여기서 어서 달아나!!!
여기 들어오면 죽어!! 어서 도망쳐!!
달봉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어가면 죽는다고? 이때 보호소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가 달봉이를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어두웠지만 그의 손에는 올가미가 들려있었다. 겁에 질린 달봉이는 있는 힘껏 목줄을 잡아당겨 풀고는 엄마 아빠의 채취가 묻은 산책 가방을 물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자갈에 발바닥 패드가 찢어지고 괴물 같은 어둠이 달봉이를 삼킬 듯 쫓아왔지만 달봉이는 무작정 뛰었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슬퍼할 엄마 아빠를 찾아서 달봉이는 뛰고 또 뛰었다.
한참을 뛰던 달봉이는 한 도로 옆 논두렁에서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달봉이는 이제 서있을 기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아까 도망치면서 깨진 소주병 유리조각을 밟은 달봉이의 발바닥 패드는 찢어져 피로 흥건해졌다. 상처를 혀로 핥아서 다행히 피는 멈췄지만 영하 15도가 넘는 추위에 달봉이는 몸이 칼로 베는 듯한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신음했다.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웅크리고 다치고 언 발을 겨드랑이 속에 넣어봤지만 추위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가로등 하나 없는 눈 쌓인 시골 논두렁 위에서 달봉이는 문득 산책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성냥개비 하나를 꺼내서 불을 붙였다. 집에서 성냥불을 붙였을 때 따뜻했던 기억이 생각난 것이다. 성냥을 켜자 온 세상이 환해지며 따뜻해졌다. 달봉이는 잠시 언발을 성냥 불꽃에 녹이며 찰나의 따뜻함에 기분이 좋아졌지만 이내 불꽃은 껴져 버렸다. 불꽃이 꺼지자 또다시 참기 힘든 추위가 달봉이를 집어삼켰다. 달봉이는 다시 성냥개비 하나를 꺼내 그었다. 그러자 성냥은 다시 환하게 세상을 밝히며 달봉이의 온몸이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달봉이는 어느샌가 집에 있었다. 나란히 소파에 앉은 엄마 아빠는 TV에서 흘러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었고 달봉이는 그 사이에서 잠들어있었다. 다정하게 손을 잡고 영화를 보던 두 사람은 곤히 잠든 달봉이를 내려다보며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따뜻한 손길로 달봉이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느끼는 달봉이는 눈물이 났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다정한 손길인가? 그러나 이내 불꽃은 꺼지고 달봉이는 다시 차가운 논두렁 위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아직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엄마 아빠의 온기가 남아있는데 달봉이는 눈앞에서 행복했던 순간이 홀연히 사라지자 슬퍼졌다.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성냥개비에 불을 붙이는 달봉이. 이번에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행복했던 순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작지만 아름답게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 달봉이는 씹다 만 개껌을 물고 엎드려있었다. 식탐 많은 레트리버가 개껌을 먹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은 서로 사랑하는 눈빛으로 끌어안고 부르스를 추는 엄마 아빠였다. 불 꺼진 거실에서 낭만적인 선율의 Eric Clapton의 White Christmas 흐르는 가운데 부르스를 추는 두 사람. 그들은 서로를 정말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엎드려 자신들을 바라보는 달봉이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달봉이가 탁자에 놓인 선물 꾸러미를 냅다 물고 도망갔다. 달봉이가 선물을 물고 도망가자 쫓아오며 까르르 웃는 두 사람. 이내 재빠른 아빠에게 붙잡힌 달봉이는 두 사람에게 안겨 폭풍 뽀뽀를 당하고 있었다. 이 눈물 나도록 행복한 순간 달봉이는 갑자기 슬퍼졌다. 불꽃이 꺼지면 이내 이 순간도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꽃은 사라지고 다시 달봉이는 차디찬 논두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씹다만 개껌 대신 차가운 돌덩어리가 달봉이 앞에 놓여있었다. 갑자기 엄마 아빠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진 달봉이는 성냥갑을 물고 또 뛰기 시작했다. 나를 이렇게 사랑했던 엄마 아빠가 나를 잃어버리고 슬퍼할 생각을 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달봉이가 금방 갈게요!!
'
달봉이의 발바닥 패드에서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꽁꽁 언 흙바닥을 힘차게 내딛는 달봉이는 발을 내딛을 때마다 찢기는 고통을 느꼈지만 엄마 아빠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까짓 고통은 대수롭지 않았다. 달봉이는 논두렁을 지나 외진 도로를 지나 점차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엄마 아빠의 채취를 찾아서 한참을 뛰다 보니 어느덧 낯익은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얗게 눈이 쌓인 한강둔치였다. 어릴 적에 엄마 아빠는 달봉이와 수시로 한강둔치에서 산책을 즐기곤 했었다. 먼 거리를 달리느라 발바닥은 만신창이가 됐고 온 몸은 흙투성이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기력은 바닥이 났지만 달봉이는 희망이 생겼다. 이곳에서 집까지 그리 멀지 않기에 조금만 힘을 내면 그리운 엄마 아빠를 만날 수 있단 생각에 달봉이는 심호흡을 하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때!! 누군가를 발견한 달봉이가 걸음을 멈췄다. 눈 쌓인 하얀 한강둔치 주차장에 엄마가 서 있는 게 아닌가? 윤기 나는 검은 긴 머리에 하얀색 롱 패딩을 입은 달봉이의 엄마가 주차장에 서서 한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소를 짓고 있는 엄마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 미소를 본 달봉이는 엄마가 자기가 여기로 찾아올 것이라는 걸 알고 기다리고 있는 거라 생각했다. 이 추운 겨울날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를 보니 달봉이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얼른 달려가 따뜻한 엄마품에 안기고 싶었던 달봉이는 몇 발자국 내딛기도 전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엄마의 새하얀 롱 패딩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다. 주먹만 한 크기에 갈색 털 뭉치의 푸들이 엄마 품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엄마는 푸들 아가가 추울까 봐 연신 옷깃을 여미며 감싸 안았다. 잠시 후 둔치 편의점에서 따뜻한 캔커피 두 개를 사 온 어떤 남자가 엄마에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캔커피를 엄마에게 건넨 남자는 엄마가 추울까 봐 자신의 목도리를 엄마의 목에 둘러주었다. 두 사람은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입을 맞추고 푸들 아가에게도 입을 맞췄다. 달봉이는 순간 네 다리에 스르르 힘이 풀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망연자실 엎드린 상태에서 달봉이는 엄마의 새 연인과 새 강아지를 미동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처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강둔치에 어둠이 짙어지고 눈발이 거세지자 엄마의 새 가족은 추위를 피해 차에 타기 시작했다. 차에 오르던 중 이상한 기운을 느낀 엄마가 달봉이 쪽을 바라봤다. 그러나 힘없이 엎드린 달봉이의 하얀 몸뚱이 위에 새하얀 눈까지 덮여 엄마의 눈에 달봉이는 보이지 않았다. 달봉이는 당장이라도 엄마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행복한 세 식구 사이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 보는 사랑하는 엄마의 모습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달봉이는 목놓아 울고 싶었지만 그 마저도 참았다. 엄마가 자기를 보면 싫어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렇게 보내주는 게 자기가 엄마한테 주는 마지막으로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추우니까 차에 얼른 타라는 새 연인의 재촉에 엄마는 차에 올랐다. 거센 눈보라 속으로 세 가족을 태운 차량은 달봉이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사라지는 엄마를 바라보는 달봉이는 온몸의 힘이 모두 빠져나가가는 것을 느꼈다. 눈발은 더욱더 거세지고 마르고 하얀 달봉이 위로 새하얀 눈이 산처럼 쌓였다. 갈 곳을 잃어버린 달봉이.. 조금씩 죽음의 깊은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너무 지치고 외로웠던 달봉이는 이제는 쉬고 싶었다.
너무 피곤해... 이젠 쉬고 싶어..
이때 뽀드득뽀드득 눈 밟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달봉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달봉이는 발자국 소리에 희미해져 가는 정신을 가다듬어 보며 눈을 떠보려 했지만 추위와 배고픔에 심장 박동수도 느려져 이내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공은 8살짜리 여자아이였다. 한강둔치에서 부모님과 눈사람을 만들던 여자아이는 눈에 파묻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는 달봉이를 발견하고 다급하게 엄마 아빠를 불러댔다. 아이의 엄마가 먼저 달려와 달봉이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눈을 치웠고 이어 아이의 아빠가 차에서 담요를 꺼내 달봉이의 몸을 감싸고는 힘껏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히터가 켜진 차 안에 의식을 잃은 달봉이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달봉이를 보며 울먹였고 다급하게 속도를 내며 운전하는 아이의 아빠는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달봉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이의 엄마는 담요로 감싼 달봉이의 마른 몸을 주물러대며 계속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봉이의 귀에 속삭였다.
조금만 기운 내보렴 아가야... 이젠 괜찮아... 괜찮아 아가야..
이때 차갑게 식었던 달봉이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 만난 이 낯선 가족이 상처 입고 버림받은 자신을 끌어안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에 삶의 끈을 놓아 버렸던 달봉이가 다시 힘을 내어 눈을 떴다. 그러자 달봉이의 시선에 자신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 짓는 아이의 엄마가 희미하게 보였다. 달봉이가 눈을 뜨자 아이도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고 아이의 아빠 역시 안도하는 표정으로 달봉이를 뒤돌아 보았다. 달봉이는 아이 엄마의 품에 파고들며 죽음의 잠이 아닌 이제는 행복한 꿈나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 꿈속에서 달봉이는 생각했다. 이들을 위해서 다시 성냥을 켤 수 있어서 너무 기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