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2부. 익숙한 세상과 안녕
9. 술 귀신
우리 집이 있는 골목에는 술 귀신이 산다. 술 귀신은 술만 먹으면 마을이 마치 자기 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함을 지른다. 게다가 텃세는 또 얼마나 심한지 바로 아랫집 사는 할머니랑 걸핏하면 싸움이다.
“애를 왜 울리노! 조용히 안 햇!!”
술 귀신이 발악하면 바로 밑에 사는 할머니도 지지 않는다. 굽은 허리로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손주 둘을 돌보는 걸 보면 노인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건 분명하다. 할머니의 새된 목청은 뭐라고 떠드는지 모르겠지만 귀가 아플 만큼 따갑다. 두 사람이 싸우기 시작하면 한쪽은 고함을 지르고 한쪽은 따발총을 쏘아댄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남자는 애새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고 하는데 정작 자기가 마을에서 가장 시끄러운 인간이라는 건 모르는 모양이다.
할머니 이전에 술 귀신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 한 명을 쫓아냈다. 전라도 말씨를 쓰던 외지인이었는데 처음에는 둘이 잘 지내나 싶더니 어느 순간 반목하는 사이로 변해버렸다. 그 남자도 문제가 있었던 게 집주인의 허락도 없이 집 보러 왔다가 남의 집에 무단으로 눌러앉은 이상한 남자였다. 아무튼 그런 이상한 남자마저 내쫓은 게 이 술 귀신이다.
조용한 마을을 시끄럽게 만드는 건 술 귀신 하나다. 술 귀신은 누구 한 명 걸리라는 마음으로 온 마을을 쏘다니며 시비를 붙인다. 그래서 시비 걸리고 싶지 않으면 술 귀신이 보일 때 절대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 눈 마주치면 쌍욕을 지껄이며 바로 다가오므로 눈은 피하는 게 좋다.
술을 안 먹으면 그나마 멀쩡해 보인다. 그때는 지나가는 마을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기도 하고 애들이 지나다니면 말을 붙이기도 한다. 물론 친절한 모습으로 그러는 건 아니다. 어딘가 껄렁껄렁한 모습이 있다.
술 귀신은 할 일도 없는지 마을 여기저기에 술병을 놓고 누워있다. 골목 초입에 대자로 드러누워 잘 때는 마을을 돌아다니기가 꺼려지는 게 사실이다. 술 귀신은 일정한 시간에 미쳐 날뛰지 않는다. 자기가 날뛰고 싶을 때 날뛴다. 가끔은 아침 댓바람부터 날뛰고 가끔은 저녁 늦게 그런다. 미쳐 날뛰는 시간이 길어지면 나는 상상 속에서 도끼를 꺼내 든다. 어떨 땐 망치고 어떨 땐 도끼다. 나는 지랄하는 술 귀신 앞에서 내가 더 지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 술 귀신은 이에 반응해 더 지랄하고 우리는 서로 지랄을 멈추지 않는다.
술 귀신이 내는 소리는 마을을 위협적으로 만든다. 술 귀신은 뭐든 깨고 부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 그가 사는 집에서는 자주 뭔가 깨지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게 아니면 쇠 자를 때 쓰는 공구 돌아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데 뭘 만드는지 겉으로 볼 때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뭘 그렇게 만날 만든다.
술 귀신은 가끔 운다. 처음에는 누가 이렇게 골목을 울면서 올라가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였다. 술 귀신은 삶에 불만이 많은 것 같다. 목 놓아 울면서 돌아다닐 때는 꼭 캄캄한 밤이다. 술 귀신은 그럴 때만 운다. 남들이 제 모습을 보지 못할 때나 운다. 낮에는 뭘 부수고 시비를 걸고 욕을 하고 지랄해도 밤에는 애처럼 운다.
술 귀신이 사는 집은 원래 그의 엄마 집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집에 엄마가 없다. 요양원에 갔다고는 하는데 정확한 건 모른다. 그에겐 장성한 아들이 있는데 같은 집에서 살지는 않는다. 술 귀신은 그래서 혼자다. 마을에서도 혼자, 집에서도 혼자다.
어쩌면 술 귀신의 분노는 외로움에서 비롯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만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분노를 키웠는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남자의 분노에는 대상이 없다. 그냥 술만 먹으면 세상 모든 것이 적이 되는 모양이다.
아침부터 뭔가 또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이번에는 소리가 둔탁한 게 심상치 않다. 애 우는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니고 개 짖는 소리가 들린 것도 아닌데 술 귀신이 발광할 이유가 뭘까 생각한다. 아무도 그를 자극할 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 순간 마을 사람들 연락으로 그 이유가 밝혀진다. 이번에 술 귀신을 자극한 건 ‘부’다. 마을을 찾은 모르는 남자의 차는 비싼 벤츠라는 이유로 박살이 난다. 그 일로 남자는 깜방에 갔다.
술 귀신이 사라지고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고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