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3부. 느린 마을에 스며들다
2. 꽃나무
인근에 새로운 도서관이 완공됐다. 이제 먼 길 걸어 묵직한 책을 이고 지고 빌려올 필요가 없다. 아직 아는 사람이 적은지 도서관에는 언제 가든 늘 빈자리가 있다. 게다가 개방된 공간이 있어 눈치 보지 않고 노트북을 두드릴 수 있게 됐다.
이동 거리도 짧아져서 이제 30분만 걸으면 된다. 새 도서관으로 향하는 내 걸음에는 어쩐지 여유가 있다. 얼른 갔다가 빨리 돌아와야 한다는 강박이 없다. 느리게 걷다 보니 하루하루 주변이 변하는 모습이 보인다. 매일 똑같은 거리,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듯 다른 하루가 매일 펼쳐지는 게 보인다.
밋밋하던 나무에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저 그렇다고 생각한 길이 며칠 만에 이름 모를 꽃들로 한층 근사해진다. 만개한 꽃나무 밑을 지날 때면 처음 맡아보는 은은한 향기가 잠자코 있던 코를 깨운다. 인공적인 향에 길들어서 생화 향을 좋아하지 않는 내 코에도 나무에 핀 꽃 냄새는 참 좋다.
“이거 무슨 나무야?”
“조팝나무.”
찾아보니 잎이 길고 하얗게 나풀거리는 건 조팝나무가 아니라 이팝나무꽃이다.
도서관을 빠르게 질러가는 길가에는 또 다른 나무가 줄지어 꽃을 피운다. 한 나무에 꽃이 지면 다른 나무에 꽃이 핀다. 먼저 보이는 아카시아꽃 뒤에 향이 좋은 꽃을 피워내던 나무는 오늘 보니 꽃잎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아쉽다.”
추운 날 찬바람에 처음 맡아보는 좋은 향기를 실어 보내던 꽃잎이 다 떨어지고 없다. 생긴 건 꼭 벚꽃처럼 생긴 그 꽃은 벚꽃에서는 맡을 수 없던 은은하고 좋은 냄새를 풍겨 내 발길을 붙잡았었다. 문득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길을 돌아보게 만들던 꽃의 이름이 궁금해진다. 얼른 날이 추워져서 다시 이름 모를 꽃 냄새를 맡는 날이 오면 좋겠다. 고작 꽃 때문에 겨울이 오길 바란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도서관 가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결코 난이도가 쉬운 길은 아니다. 우리 집도 꼭대기에 있고 도서관도 꼭대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꼭대기에서 내려와 건너편 꼭대기로 걸어가야 한다. 내려올 땐 수월하다가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는 한겨울에도 땀이 뻘뻘 난다.
요 며칠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했더니 허벅지는 탄탄해지고 살이 조금 빠지는 것 같다. 먹는 건 엄청 먹어 대는데 몸이 가뿐하니 괜히 기분이 좋다. 몸이 좋아지는 김에 격일로 하던 운동을 매일 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몸이 눈에 띄게 탄탄해지는 게 보인다. 허리에서 골반으로 떨어지는 라인이 선명해질 때마다 나는 더 신이 나서 운동한다.
며칠 오버했더니 아침부터 목이 안 돌아간다. 그래도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일시적인 근육 뭉침인 줄 알았는데 며칠이 지나도 풀리지 않아 당황스럽다. 며칠 약을 먹어도 뻣뻣한 목에 차도가 없자 나는 운동을 잠시 중단한다. 역시 쉬지 않고 달리면 결국에 억지로라도 쉬게 된다.
날이 풀리자 나무에는 또 한 번의 변화가 찾아온다. 이팝나무꽃도 지고 아카시아꽃도 진다. 향이 좋던 이름 모를 꽃나무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초록의 작은 열매가 올망졸망 달려있다.
매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