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3부. 느린 마을에 스며들다
1. 노인
잠이 오지 않는다. 사는 게 너무 막막해서 새벽부터 운동화를 꿰어신는다. 아무런 성과 없이 사는 삶에 조바심이 밀려온다. 나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쫓겨 새벽빛이 어스름한 마을로 내몰리듯이 뛰쳐나온다. 눈물이 울컥 올라오는데 울 수가 없다. 느린 마을을 이루고 있는 주민 대부분이 노인이라 아침 일찍부터 깬 노인들로 마을은 벌써부터 분주하다. 나는 일단 발 닿는 곳으로 간다. 목적 없이 어디론가 간다.
“거기 길이 있어요?”
마구 걷고 있는 내게 한 노인이 묻는다.
“저기 짧은 산책로가 있어요.”
어제 발견한 곳이다. 생각난 김에 그리로 발길을 돌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컴컴한 계단을 오르자 나보다 먼저 온 노인들의 모습이 어둠 속에 하나둘 보인다.
노인들은 왜 아침잠이 없을까?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왜 저렇게 일찍 깨는 걸까?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달성해야 할 삶의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저들은 왜 저렇게 일찍 일어나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걸까?
“그냥 좀 집에 계시지.”
빗길에 넘어진 한 노인을 본다. 태풍이 불어오는 오늘 같은 날 노인은 빗길을 헤치며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걸까? 찰나에 놀라 주변을 둘러본다. 넘어진 노인을 발견한 건 나 뿐이 아니지만, 섣불리 노인을 도우러 달려가는 발길은 없다. 나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노인에게 달려간다. 그러자 넘어진 노인 뒤를 걸어오던 아저씨도 덩달아 달린다.
“괜찮으세요?”
노인을 일으켜 세우자 입가에 피가 흥건하다. 턱이 찢어진 건지 치아가 부러진 건지 모르겠다. 노인은 연신 미안하단 말과 고맙단 말을 번갈아 한다. 말하는 내내 검붉은 피가 노인의 턱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제 모습을 아직 확인하지 못한 노인은 얼굴을 만져보고 나서야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인지한다. 나는 얼른 근처 슈퍼로 뛰어가 휴지를 조금 빌린다. 다행히 슈퍼 주인은 내 옷에 묻은 노인의 핏자국을 보곤 휴지를 내어준다. 그 사이 노인은 잠깐 벽에 기대어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있다. 휴지를 건네자 노인은 피로 물든 내 옷자락을 보며 미안해서 어쩌냐고 말한다.
아저씨가 노인에게 연락할 사람 없냐고 묻는다. 노인은 딸과 아들이 있는데 딸은 멀리 사니 아들에게 연락해달라고 말한다. 나는 노인의 핸드폰으로 노인의 아들에게 전화를 건다. 조금 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온 건 또 다른 노인이다. 나는 나이 든 아들이 노모를 데리고 병원으로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냥 좀 집에 계시지. 뭐하러 오늘같이 비 오는 날에…….”
노인들은 아침잠이 없다.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아침부터 온 세상을 누비고 다닌다.
언젠가 그런 노인이 부럽다던 또래 친구가 생각난다. 젊은 채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버거워서 차라리 노인이 되고 싶다던 친구의 마음을 알 것도 같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해야 할 게 넘쳐서 좀처럼 삶을 즐길 수 없는 20대를 보내고도 여전히 아침이 오는 게 두려운 나는 노인들의 삶보다 오히려 더 늙고 지친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왜 하루하루 뭘 해야 한다고 여기며 살고 있을까?
결국 나이가 들어 노인이 되면 저들처럼 딱히 할 일 없이도 조급해하거나 불안에 떨지 않고 느긋하게 세상을 누비게 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