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마을 일기 2부. 익숙한 세상과 안녕
11. 사랑
“사람은 안 변해.”
누군가 말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변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버지를 떠올린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말하는 손녀에게 “할아버지도 사랑해.” 대답하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된 아버지는 내가 알던 사람과 조금 달라 보인다. 자식인 내겐 살면서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았으면서 손녀에겐 사랑한단 말을 아무렇지 않게 곧잘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여태 내가 알고 있던 아버지에 대한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단 생각을 한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늘 화가 나 있었다. 감정 변화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대수롭지 않은 말에 발끈하거나 분노하는 바람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걸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 편할 리 없었다. 기본적으로 가족들이 함께 있으면 일상적인 대화가 거의 불가능했다. 재밌자고 한 이야기에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불신을 언급해 말을 끊어버리는 기묘한 재주를 부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싫었다.
그냥 좀 가볍게 살면 안 되나?
그냥 좀 즐겁게 웃으면서 살면 안 되나?
어른이 되고 사회의 혹독한 맛을 보고 나서야 아버지가 짊어져야 했을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버거웠을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평소에 말수도 없고 유머도 없는 양반이 밖에서 나이 어린 상사한테 뜯기고 집안에서 엄마한테 잔소리 들어가며 얼마나 많은 회의를 느꼈을지 그때는 왜 생각을 못 했을까?
나이가 들수록 엄마는 거대해지고 아버지는 쪼그라든다. 엄마는 자기주장이 세지고 아버지는 그저 입을 다문다. 엄마는 마치 과거에 아버지가 지은 죄를 그렇게라도 보상받아야겠다는 듯이 당당하고 아버지는 엄마의 기세에 조금씩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가 약해지는 모습을 보이자 내내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도 사그라든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최초의 나이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아버지를 차츰 이해해간다.
나는 전에 없던 짓을 하기 시작한다. 엄마와 아버지가 다툴 때 괜히 아버지 편을 들어본다. 난데없이 편을 들자 아버지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엄마의 통제에 숨 막혔을 아버지가 과거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사람 피를 말린다던 그 말을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성질 급한 엄마와 느긋한 아버지 사이에서 어느 한쪽만 속이 타는 게 아니므로 나는 적절히 두 분 사이를 오가며 양쪽을 두루 달랜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던 아버지도 이제 아버지를 두둔하는 상황을 낯설어하지 않는다. 내가 아버지 편을 들기 시작하면서 아버지는 그다지 화를 내거나 큰 소리 내지 않는다. 예전이라면 다툼이 될 법한 일도 별일 아닌 게 되어 넘어간다. 그렇게 내가 변하기 시작하니 아버지가 변한다. 내가 변하니 엄마도 변한다. 이제 엄마도 아버지를 함부로 다그치지 않는다. 나는 이 변화 속에서 사랑은 이해와 존중과 배려라는 생각을 한다.
“나도 그런 줄 알았거든? 근데 변하는 사람도 있더라. 나는 아빠한테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단 말이야. 물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라는 건 알지. 근데 아빠가 조카한테 사랑한단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 그걸 보는데 그냥 고맙더라. 나한테는 안 해줬지만 그래도 내 조카한테는 해줘서 그게 고맙더라.”
어쩌면 아버지는 우리에게 못다 준 사랑을 손녀에게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알게 모르게 내 속에 있던 설움도 덩달아 씻겨 내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