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

느린 마을 일기 1부. 경주마, 낯선 마을에 가다

by 이나

4. 포장


가끔은 상대방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다. 한번 꺾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다.

일하는 매장에 대뜸 한 남자가 들어온다. 허름한 옷을 입은 남자는 키가 크고 이상한 사투리를 구사한다. 경상도 사투리도 아닌 것이 조선족 말투거나 이북 말씨를 쓰는 것 같다. 나는 화장품 가게에 어울리지 않는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러자 남자는 말한다.


“내가 점 볼 줄 아는데 혹시 봐줄까요?”


나는 이어지는 남자의 말을 단호하게 잘라먹으며 말한다.


“아니요.”


남자는 나를 설득해보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낸다.

나는 남자의 말이 동시에 내 말과 씹히는 걸 개의치 않고 반복해서 말한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랬더니 남자가 하는 말, “고집이 세네. 그게 문제네.”

그러더니 홱 매장을 나가버린다.

진짜 뭘 볼 줄 알았으면 내가 고집 세서 당신 말 거절할 것도 알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사짜구만!


이번엔 웬 할머니가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온다.


“혹시 미안한데,”


한 60대 후반 즈음 보이는 할머니는 약간 망설이며 수줍게 상자를 내민다.


“네. 뭐 때문에 오셨어요?”

“이거 포장만 좀 해줄 수 있어요?”


노인이 내민 건 다른 브랜드에서 산 화장품 세트다. 딱히 오프라인 매장을 본 적 없는 브랜드인 걸로 봐서 인터넷으로 주문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죄송한데요, 제가 포장을 못 해서요.”


나는 해주기 싫단 말을 그렇게 대신한다. 그러자 노인이 다시 한번 부탁한다. 마치 웬만큼 이렇게 하면 대부분 들어주지 않느냐는 태도다. 노인의 마음을 간파하자 청개구리 본능이 되살아난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내 속엔 아직도 청개구리가 살아있다.

나는 당연히 될 거라 생각하는 심보가 순간 괘씸해서 다시 한번 거절한다. 그런데도 노인은 물러서질 않고 계속해서 요구한다. 다음에는 여기 와서 꼭 화장품을 사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그러자 나는 더 들어주기 싫어진다. 그래서 절대 들어주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한 번 더 거절한다. 노인과 나의 실랑이가 몇 차례 더 오간 후에야 노인은 새초롬한 표정으로 “아 됐어요.”하고 돌아선다. 나는 끝까지 노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기어코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만든다.

내가 인정이 없는가? 노인이 무례한가. 끝없이 요구하는 모습이 싫다. 거절을 거절하는 태도가 싫다.

가끔은 상대방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다. 한번 꺾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딱히 이유는 없다. 그냥 그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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