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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회의 경쟁 스트레스 : 과거시험을 둘러싼 이야기

by 너우니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단순한 학문적 시험을 넘어 개인과 가문의 운명을 좌우하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 유교가 교육을 통해 신분 상승과 도덕적 완성을 이루는 길로 강조하면서, 과거 합격은 양반 계층에게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를 보장하는 핵심 열쇠였다. 그러나 합격자가 극소수에 불과한 반면 응시자는 수천 명에 달했고, 이로 인해 생긴 경쟁의 압박은 조선 사람들의 삶에 깊은 스트레스를 안겼다. 과거시험은 지식을 겨루는 것을 넘어 생존과 명예를 건 싸움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좌절, 경제적 몰락, 심지어 극단적 선택까지 이어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 사회에서 과거시험이 낳은 경쟁 스트레스를 몇 가지 상황과 대표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낙방의 무게와 절망


과거시험에서 떨어지는 것은 개인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합격하지 못하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고, 경제적 기반이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과거에 낙방한 선비 중 일부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이는 과거 급제자가 한 해에 30~100명 수준으로 극히 제한적이었던 반면, 응시자는 수천 명에 달해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준다. 낙방은 단순한 실망을 넘어 삶의 전환점을 잃은 절망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압박은 조선 사회의 경쟁 문화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경제적 부담과 가문의 몰락


과거 준비는 오랜 시간과 큰 비용을 요구했다. 경전을 암기하고 시험에 맞는 글을 쓰기 위해 서당에 다니거나 교사를 고용해야 했고, 한양으로 시험을 보러 가는 여비와 체류비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 시대 문헌에 따르면, 많은 선비들이 이 과정에서 가산을 탕진했고, 합격에 실패하면 가문 전체가 빈곤으로 내몰리는 일이 흔했다. 과거시험은 개인의 노력을 넘어 가족의 생계를 건 도박과도 같았으며, 실패는 가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이는 경쟁이 집안 전체를 얽매는 스트레스의 원천이었음을 말해준다.


공정성 논란: 기묘과옥 사건


과거시험의 공정성 문제는 경쟁 스트레스를 더욱 심화시켰다. 대표적인 사례로,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숙종 25년(1699, 기묘년) 8월 5일 기록에 따르면, 과거장에서 시험관과 실무자들이 결탁해 부정을 저질렀다. 이들은 답안지를 바꿔치기하고 이름을 도용해 특정인을 합격시켰으며, 이 사실이 드러나자 해당 과거가 폐지되고 34명의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이 사건, 즉 기묘과옥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공정한 결과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고, 노력해도 보상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불안감을 키웠다. 공정성 논란은 과거시험을 둘러싼 스트레스를 사회적 차원으로 확장시켰으며, 당시 응시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치열한 경쟁의 규모


과거시험의 경쟁 규모는 그 자체로 압박의 상징이었다. 정조 시기 세자 책봉을 기념한 특별 과거에는 약 2만 명이 넘는 응시자가 몰렸고, 영조 시기 문과 시험에서는 초시에 7,000여 명이 응시했으나 최종 합격자는 33명에 불과했다. 이런 숫자들은 조선 사회에서 과거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꿈이자 동시에 좌절의 원천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합격의 문이 좁을수록 경쟁은 치열해졌고, 이는 응시자들에게 끊임없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안겼다.


준비 과정의 고통


과거 준비는 신체적·정신적 한계를 시험하는 여정이었다. 밤낮없이 경전을 암기하고 시험에 맞는 글을 연습해야 했던 선비들은 과로로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공부에 몰두하다 병을 얻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사례가 종종 등장한다. 이는 합격 여부와 관계없이 준비 과정 자체가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했음을 보여준다. 과거시험은 응시자들의 체력과 정신을 극단까지 몰아붙였다.


노년에 이른 집착


과거시험에 대한 열망은 나이를 초월했다. 이에 조선 후기에는 노인들만 응시하는 과거제도가 생겼는데 '기로과(耆老科)'가 바로 그것이다. 최초로 실시한 때는 영조 32년으로 그 해는 대비(인원왕후)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영조는 이를 널리 알리고 기쁨을 나누기 위해 창경궁 춘당대에서 60세 이상을 모아 왕의 참관하에 문과,무과를 치렀다. 과거시험에 매달려 평생을 허비하다가 좌절했던 선비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이다. 조선시대 최고령 과거급제자는 고종 27년의 정순교(丁洵敎)라는 사람으로 그 때 그의 나이가 86세였다. 이는 과거가 단순한 시험을 넘어 삶의 목표이자 강박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경쟁의 끈을 놓지 못한 모습은 조선 사회에서 과거시험이 얼마나 깊은 스트레스를 안겼는지를 상징한다.


결론


조선 시대 과거시험은 치열한 경쟁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의 결정체였다. 낙방의 비극, 경제적 부담, 기묘과옥 같은 공정성 논란, 대규모 경쟁, 준비 과정의 고통, 노년에 이른 집착은 모두 당시 사람들이 겪은 압박을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사회의 유교적 가치와 과거제도가 얽히며 만들어진 필연적 결과였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교육열과 공정성에 대한 집착은 이 역사적 경험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으며, 조선 시대 경쟁 스트레스의 뿌리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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