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시작을 알리는 배우의 첫 대사는 너무나 중요하다. 햄릿의 첫 대사는 ‘누구냐’로 시작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는 인물. 그 스산함과 기묘함을 느끼고 있는 인물의 심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사이다. 햄릿의 이 대사를 통해 관객들은 자연스레 극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감각적으로 전달받게 된다. 그만큼 연극에서의 첫 대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나는 하루의 시작을 여는 첫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오늘 하루를 어떠한 말로 열어가는가. 지겹도록 울리는 알람을 끄며 신음을 내뱉는가. 말을 내뱉는다는 어떠한 의식도 없이 정신없이 세수만 하고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오는가.
얼마 전 나는 6살 꼬마와 함께 7살 형의 엄마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2박 3일의 꽉 찬 여행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의 빈틈없이 말하고 움직이고 웃었다. 아이들을 따라 엄마들도 바삐 움직이며 웃어댔다. 다행히 허락된 따뜻한 날씨에 겨울의 바다에도 손발을 담그며 끝도 없이 노는 아이들과 오랜만에 자연을 다 가져보는 풍만함을 만끽했다. 저녁이면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끝까지 조금이라도 더 놀아보고자 하는 아이들을 재워보고자 자는 척을 하며 잠들었다.
제주에서의 마지막 아침 조용히 눈을 떴다. 어느 틈엔가 6살 꼬마가 눈을 떴다. 나는 손으로 형이 아직 잔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아이는 알겠다며 이불 속에서 인형과 함께 조용히 꿈틀대고 있었다. 꼬마는 심심한지 어제 가지고 놀던 종이 오르골 상자를 가지고 와 조용히 돌려보았다. 그러고는 반응이 없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 부드러운 감자 ”
7살 형이 잠에서 깨어나 처음 뱉은 말이었다.
그 말은 들은 6살 꼬마는 놀람과 기쁨의 표정을 짓더니
“ 부드러운 침대 ”
“ 부드러운 색종이 ”
“ 부드러운 돌멩이 ”
“ 부드러운 선물 ”
“ 부드러운 사우나 ”
“ 부드러운 정수오 ”
“ 부드러운 물똥 ”
“ 부드러운 설사 ”
“ 부드러운 철 ”
“ 부드러운 곰 ”
아이들은 낄낄대며 한참을 부드러운 무언가라고 이야기하며 서로를 확인하고 정다움을 주고받았다. 그 말들은 리드미컬했고, 말처럼 정말 부드러웠다.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이 더해져 이불에 가만히 눈을 뜨고 있는 나를 미소 짓게 했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다정하고 상냥한 아침의 인사였다.
“ 일어날까? 노래 나왔던 기계 보여줄까? ”
6살 꼬마는 형과 함께 일어났다. 나는 분명 오늘의 하루가 이렇게 정겹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부드러울 것만 같았다.
아이들이 뱉었던 그 리듬의 말들은 내게 아직도 계속 맴돈다. 그날 이후 침대에서 눈을 뜨며 나는 조용히 말해본다. 왠지 나도 모르게 오늘 하루가 부드러운 무언가가 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침을 깨우는 아이들의 첫 말, 연극을 알리는 배우의 첫 대사. 지금의 시간을 열어준다. 지금이라는 너무나 당연했던 시간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이 놀랍게 분명해지고 온전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지금을 오롯하게 느끼는 감각은 나를 설레게 하며 이유 모를 행복감에 빠져들게 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