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째 꼬마는 눈을 뜨자마자 커튼을 열어젖히는 것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이었다. 하얀 커튼을 젖히고는 아쉬운 탄식이 이어졌다.
눈이 온다던 일기예보는 며칠째 정말 이상하리만큼 들어맞지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 어느 날 저녁 정말 세찬 바람이 불자 나와 꼬마는 내일은 분명 눈이 올 것이라며 잠들기 전 베란다에 앉아 내일의 날씨를 확신했다.
다음 날 아침. 이미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햇볕 때문에 우리는 눈이 오지 않았음을 느꼈다. 또 꽝이구나. 하지만 쏟아지는 햇볕 때문인지 날씨가 야속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환하고 따스한 햇살이 비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거실까지 쏟아지는 햇볕 때문인지 따뜻하고 달콤했던 토마토수프가 불현듯 떠올랐다.
7년 전 핀란드의 눅시오 국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소복이 눈이 온 산길을 걸으며 고요한 자연과 마주했었다. 루돌프와 산타가 어딘가에서 나오지 않을까 생각이 드는 산길이었다. 얼어있는 얼음 밑으로 졸졸 흐르던 시냇물들의 소리가 들릴 만큼 산은 아주 고요했다.
그 고요함을 즐기고 내려와 먹은 음식이 바로 토마토수프였다. 빵 덩어리와 함께 나온 토마토수프는 정말 달콤하고 따뜻했다. 간단하지만 풍족한 식사에 추위와 주린 배를 함께 달랠 수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한국에 돌아와 나의 뱃속에 꼬마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함께 토마토수프로 마음과 몸을 달랜 셈이다.
나는 그 햇볕 덕에 토마토수프를 만들어 보고 싶어졌다. 어떻게 하는지 인터넷을 뒤지고 싶지 않았고, 먹으면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토마토를 삶기 시작했다. 그때, 꼬마는 색종이와 가위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꼬마는 토마토 수프를 끓이고 있는 나를 연신 불렀다. 자신이 눈 결정체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겠다며 나를 앉혔다. 못 이겨 식탁에 앉았다. 네모로 세모로 이리저리 꼬마가 하자는 대로 접어보았다. 하지만 따라야 할 방법이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꼬마는 어느새 자유롭게 잘라보라는 듯 내게 가위를 건넸다.
좋다! 어디를 잘라야 할까? 자르기도 전에 신중해지는 내게 꼬마의 가위질은 아주 가볍고 경쾌하게 마구잡이로 지나다녔다.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그래!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꼬마와 내가 만든 눈 결정체가 하나둘 알지 못하는 새로운 모양을 들어낼 때면 우린 함께 탄성을 질렀다. 이윽고 꼬마는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스케치북과 연필을 들고 왔다. 꼬마는 집을 그리고 조금 떨어진 건물을 하나 더 그리고는 그곳에 아주 작은 눈 결정체를 그리고 있었다.
꼬마는 여러 모양의 눈 결정체를 그리고는 다른 놀이를 하러 거실로 떠나버렸다. 아주 쿨하게. 아직 꼬마는 눈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파를 방방 뛰며 신나게 움직이는 꼬마를 한번, 남겨진 색종이와 그림을 한번 번갈아 보게 되었다. 눈을 기다리며 기대하고 아쉬워하는 그 반복에서 꼬마는 마치 자신만의 방법을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다. 소파에서 뛰는 저 가벼운 꼬마의 몸짓, 그리고 꼬마의 표정에서 꼬마가 다시 눈을 처음처럼 기다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마는 눈을 기다린다. 그러나 지치거나 아쉬워하지 않는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어릿광대의 무기력함, 이유 없음이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기다림의 사이를 채워냈다면, 아이들의 기다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샘솟는 무언가를 따라간다. 온전하게 따라가며 생동한다.
아이들의 기다림은 반복에서 오는 허무함과 공허함 대신 지금 여기에 존재함으로써 놀이한다. 눈이 오지 않는다면 눈을 만들고, 눈을 그리며 눈을 생각한다. 그렇기에 기다림의 사이는 어떠한 감정이 아닌 생동하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나도 아이와 같이 무언가를 기다릴 수 있을까.